[정동칼럼]‘아베 담화’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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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정동칼럼]‘아베 담화’ 어디로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1. 29.

2015년은 우리에게 광복 70주년이지만 일본에게는 전후 혹은 종전(終戰) 70주년이다.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이기도 하다. 작년에는 양국이 ‘고노 담화’ 재검증으로 시끄러웠다면 올해는 ‘아베 담화’가 불씨이다. 장기집권 가도에 오른 아베 정권이 전후 50주년에 나온 ‘무라야마 담화’를 어떤 형태로든 검증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초부터 역사인식 논쟁은 시작되었고 전도는 밝지 않다.

출발은 아키히토(明仁) 일왕으로 그의 신년 소감은 대단히 흥미롭다. 지난 전쟁의 참상을 환기하면서 “만주사변에서 시작된 이 전쟁의 역사를 십분 배워서 향후 일본의 태세를 고찰하는 일이 현시점에서 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발언이었다.

만주사변이란 1931년 일본의 관동군이 남만주철도를 폭파하고 이를 구실로 전면적 만주침략을 단행한 사건이다. 이후 만주국이란 괴뢰국이 건설되었고 1937년 중일전쟁 개시,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로 이어지는데, 만주사변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일왕의 주장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일관된 전쟁수행 과정이란 뜻이다. 1931년 시작되어 1945년 끝난 ‘15년 전쟁’이란 일본이 만주와 대륙, 나아가 동남아를 군사적으로 지배하고 자원을 총동원하여 미국과 최종전을 결행한 침략전쟁이다.

15년 전쟁으로 보는 일왕의 역사관은 역사수정주의자의 ‘대동아전쟁’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대동아전쟁은 서양 제국주의 지배로부터 아시아를 지키려 한 전쟁이다. 이른바 ABCD(America, Britain, China, Dutch) 포위망의 압력에 대항하여 방어적 선제공격으로 1941년 진주만을 습격하면서 발발한 전쟁이어서, 비록 그 과정에서 아시아인들의 희생이 초래되었으나 아시아 방위의 명분으로 정당화된다. 요컨대, 전쟁 발발의 시점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전쟁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아키히토 일왕이 예외적으로 만주사변을 거론한 까닭은 대동아전쟁관, 더 정확히 현 정권의 역사인식을 우려하는 데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같은 날 아베 총리의 신년 소감의 초점은 역사인식보다는 애국심의 강조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는 “대전(大戰)에 대한 깊은 반성”이란 짤막한 언급 후 전후 평화와 민주주의를 향한 일본의 노력을 상찬하면서,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혹독한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금메달을 쟁취한 여자배구팀 다이마츠 감독이 즐겨 쓴 “하면 된다”라는 구호를 상기하였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여자 배구팀의 헌신이 올림픽 개최의 성공을 가져다주고 일본을 세계의 중심으로 진입시켰던 영광의 과거를 본받아 개혁을 통해 일본이 지향하는 새로운 국가의 모습을 세계에 발신하자는 것이다.

과거의 사죄보다 미래의 기약이 중요하다는 그의 논지는 지난 1월25일 논란을 불러일으킨 NHK 발언으로 이어지고 있다. 전후 70년을 기념하는 아베 담화에 “무라야마 담화가 사용한 언어의 반복 여부보다는 일본이 어떤 세계를 만들려 하는가 하는 미래에 대한 의사를 담아내고 싶다”고 하여 ‘식민지배와 침략’, ‘통절한 반성과 사죄’ 등 키워드를 사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겼다. 역사수정주의자 아베다운 발언이다.

일본의 아베 총리가 종전 70주년을 맞이해 대중들에게 연설을 하고 있다. _ AP연합


작년 12월 총선에서 대승하여 국내 정치적 기반을 다지고 일본의 절대적 상징인 ‘덴노(天皇)’의 메시지마저 비켜가는 아베 총리가 새로운 담화를 마음대로 쓸 수는 없다. 정작 신경 쓰는 대상은 전쟁 당사자이자 동맹국인 미국이다.

미국은 진주만에서 히로시마까지 일본만을 상대한 ‘태평양전쟁’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과 아시아간 전쟁, 아시아 역사문제에 무지하다. 따라서 역사문제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전략적 이익을 본격적으로 훼손하지 않는 한 한국과 중국의 윤리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향후 ‘아베 담화’의 수위를 가늠해 본다면, 아마도 중국 및 한국과 격렬한 외교전을 유발하여 미국의 전략적 우려를 본격화시키지 않을 정도, 미국의 태평양전쟁관을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는 정도가 제시될 것이다. 적에서 동지로 탈바꿈한 전후 미·일관계의 맥락에서 스스로의 성공신화를 평가하는 속에서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의 의미는 가려지지 않을까.


손열 |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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