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아카이빙 민주주의’의 단면
본문 바로가기
경향 국제칼럼/특파원 칼럼

[특파원 칼럼]‘아카이빙 민주주의’의 단면

by 경향글로벌칼럼 2020. 10. 7.

‘미디어 정치’는 정치인들이 미디어를 통해 메시지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 지지를 획득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미디어의 발달과 변화가 정치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인터넷의 보편화는 정치인과 정치집단이 전통 미디어에 기대지 않고 시민과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시민 입장에서도 인터넷은 정치인에게 지지·반대·압력을 보낼 수 있는 통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고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의 후임 대법관 후보를 지명하고 공화당이 인준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란은 아카이빙 민주주의 시대의 단면을 보여줬다. 트럼프 대통령은 긴즈버그 전 대법관이 별세한 다음날인 지난달 19일 후임 대법관 후보자 지명을 예고했다. 그리고 며칠 뒤 에이미 코니 배럿 제7연방항소법원 판사를 공식 지명했다. 여당 공화당의 미치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와 인사청문회를 책임지는 상원 법사위원장인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호응하면서 대선 전 인준 마무리를 서두르고 있다.정보를 사실상 무제한 저장할 수 있고, 언제 어디서나 저장된 정보를 꺼내볼 수 있게 해주는 디지털·인터넷 미디어가 현대 정치에 미치는 영향은 넓고 깊다. 특히 언론과 시민의 정치 감시가 용이해졌다. 실시간 정보 축적과 검색이 가능해지면서 ‘아카이빙(archiving) 민주주의’ 시대가 열렸다.

매코널 원내대표와 그레이엄 상원의원의 발언이 나오자마자 그들의 4년 전 행적을 보여주는 게시물이 언론과 소셜미디어에 나돌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16년 2월 보수 성향 앤토닌 스캘리아 대법관이 사망하자 3월 후임으로 메릭 가랜드 후보자를 지명했다. 하지만 상원 과반수를 차지한 야당 공화당은 인준을 거부했다. 대선이 임박했다는 이유였다. 선봉에 매코널 원내대표와 그레이엄 상원의원이 있었다. 매코널 원내대표가 “대통령이 지명할 권한이 있듯이 상원은 동의를 제공하거나 유보할 헌법적 권리를 갖는다. 이번에 상원은 권리를 보류하겠다”고 했던 말이 복원됐다. 그레이엄 상원의원 역시 “만약 공화당 소속 대통령이 첫번째 임기 마지막 해에 (대법관) 공석이 발생한다고 해도 나 린지 그레이엄은 다음 대통령에게 맡기라고 하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소셜미디어에 올라왔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전형적 사례다.

한국에서도 대통령의 권력 남용을 비판했던 야당이 집권하면 똑같은 사안에 관해 ‘대통령의 정당한 권한 행사’라고 강변하는 사례가 흔하다. 재정 적자가 발생하면 나라가 곧 망할 것처럼 비판했던 야당은 집권하고 나면 크게 우려할 것 아니라는 식으로 말을 바꾼다.

아카이빙 민주주의 심화와 함께 정치인의 내로남불 폭로도 잦아지고 있다. 정치인과 정치집단의 과거와 현재 행적을 검색·비교하는 게 쉬워졌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치인의 책임성을 강제하는 기제로 작용할 것이란 기대를 가져도 좋을까? 안타깝게도 이 질문에 ‘그렇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미국 공화당 주류가 4년 전 한 정반대의 말과 행동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복원되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법관 후보자 인준을 밀어붙이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0061452001&code=990100#csidxe8753ea73d0756da0126a8c9e1c9bf6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