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구병 | 아주대 교수·사학
얼마 전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사망한 뒤 세계의 여론은 대륙의 미래에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 관심 있게 지켜보는 듯하다. 그에 앞서 필자의 주목을 끈 것은 사망 소식을 접한 베네수엘라인들의 격정적인 오열과 거리를 꽉 메운 애도 인파였다. 이런 광경은 수십년 전 아르헨티나 후안 페론 부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중과 지도자의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비판자들은 차베스나 페론을 ‘포퓰리스트’로 지칭해왔다. 그들은 포퓰리즘이 기존 정당에 대한 불신을 극대화하는 전략으로 정당정치의 틀을 뒤흔들고 과도한 대중 동원을 통해 혼란을 고착시켰으며 때로는 한 국가의 몰락을 초래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규탄의 목소리를 높인다. 반면 지지자들에게 차베스나 페론은 친밀하고 인기있는(popular) 지도자로서 이전의 과두지배 시대와는 달리 대중의 정치 참여를 독려한 변혁의 주역이었다.
베네수엘라 국민들 차베스 추모
(경향신문DB)
포퓰리즘은 라틴아메리카 태생은 아니지만 그 지역의 특징적인 정치 양식으로 부각되었다. 문제는 포퓰리즘이라는 표현이 일종의 정치적 욕설이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시대를 막론하고 포퓰리스트로 지목되는 인물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영국의 역사학자 앨런 나이트에 따르면, 모두에게 포퓰리즘은 낯설 뿐 아니라 누군가를 테러리스트로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없이 일방통행적인 개념이었다. 1930~40년대 브라질의 제툴리우 바르가스, 멕시코의 라사로 카르데나스,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은 훗날 라틴아메리카의 고전적 포퓰리스트로 손꼽히게 되었지만 당시 그들의 체제를 지칭하는 데 이 용어가 쓰인 적은 없다. 학술적 개념으로 등장한 이 용어는 그 공세적 유용성을 확인한 후속 세대 정치인과 지식인들의 애용에 힘입어 널리 알려졌다. 예컨대 멕시코에서 1980~90년대에 카를로스 살리나스 대통령은 신자유주의 노선을 따르면서 반대 세력의 정치적·경제적 포퓰리즘을 비난한 바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역시 여러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포퓰리스트’로 분류되었다.
포퓰리즘은 흔히 법치에 대한 위협이자 민주주의의 왜곡으로 간주된다. 한국의 언론도 포퓰리즘을 무책임한 대중선동이나 과도한 재분배·복지 정책을 위시한 반제도적 정치 행태로 기술한다. 포퓰리즘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노선이라는 부정적 함의 탓에 그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에 관한 논의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한되어 왔다. 하지만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같은 이론가들은 새로운 사회 집단이나 불만에 찬 유권자들을 민주주의 과정에 포함하려는 전략으로 포퓰리즘의 의의를 재평가하면서 반성의 계기를 제공한다.
더욱이 민주주의의 원래 의미가 ‘인민의 지배’라는 점을 상기할 때, 18세기 말 이래 대의제 민주주의(사실상 엘리트 중심의 정치 질서)가 지속적으로 축소해온 이 근본 속성을 대중에게 환기시키는 작업은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이런 시도를 우려와 혐오의 틀로만 바라보는 것은 진영 논리에 따른 폄하일 것이다. 어떤 정치적 움직임을 포퓰리즘으로 규정하기에 앞서 그것이 위로부터 추진한 기획일 뿐 아니라 자발적인 대중 참여의 서막이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포퓰리즘으로 알려진 정치 운동이나 체제는 권력욕에 물든 지도자의 일방적 포섭과 동원만이 아니라 지도자와 대중 간의 교섭 또는 이해관계 합치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대중의 자발성을 약화시키거나 제한하는 정치 체제, 대중의 참여를 권장하지 않는 체제는 함량 미달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밖에 없다. 돌이켜보건대 포퓰리즘은 한국 사회에서 특정 정치 세력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정치 이념에 상관없이 어떤 세력이든 포퓰리즘적 접근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 이제는 일하게” 해 달라는 요즘 집권 여당의 현수막 시위 또한 정당정치의 틀을 우선시하기보다는 필요에 따라 직접 대중에게 호소하는 전략, 달리 말해 포퓰리즘적 속성을 강력하게 발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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