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칼럼]기념일 노래와 역사적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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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국제칼럼]기념일 노래와 역사적 기억

by 경향글로벌칼럼 2016. 5. 30.

여러 나라에서 특정 날짜, 장소, 노래, 인물이 정치사회적 분열을 뛰어넘어 국민적 유산이 된 시점은 언제쯤이었을까. 5월18일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에 ‘님을 위한 행진곡’의 부르기 방식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을 마주하며 어떤 책에서 읽은 질문이 떠올랐다. 또 국가보훈처의 반응에 답답함을 느꼈지만, 18세기 말의 프랑스 혁명에 대해 “평가하기에 너무 최근의 사건”이라고 말했다는 마오쩌둥의 답변에 비춰본다면 이는 당연한 충돌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혁명 기념일을 언제로 정할 것인지에 대한 프랑스 사회의 격렬한 논쟁은 혁명 발발 후 한 세기 가까이 지속됐고 1880년에야 7월14일이 ‘분노의 날’을 넘어 국민적 기념일로 인정되기 시작했다. 당파적 유산이 제도로 자리 잡은 것이었다. 그러나 1983년 7월14일에도 우파 성향의 신문 르피가로가 바스티유 감옥 습격이 일종의 신화라고 비판하는 등 좌·우파의 이견과 긴장이 깔끔히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혁명의 와중에 프랑스의 국가(國歌)로서 신속히 승인된 ‘라 마르세예즈’의 앞길 역시 19세기 중엽 이후 그리 순탄하지만 않았다. 원래 마르세유의 의용대원들이 부른 이 노래는 혁명의 확산을 막고자 개입하려는 외세에 맞선 진군가였는데, 한편에서 보편적 자유와 저항의 찬가로 칭송받았지만 다른 한편에선 가사의 호전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잇따랐다.

1990년대 초에 “피의 깃발이 솟았다” “적들의 더러운 피가 밭고랑에 넘쳐 흐를 때까지”와 같은 증오와 분노의 가사를 평화와 화합을 지향하는 가사로 바꾸자는 개작 운동이 펼쳐졌을 때, 여론조사 응답자의 40%가 가사의 과격성을 인정했지만 75%는 그렇다고 가사를 바꾸는 데 동의하지 않았다.

강렬한 정치적 동기나 섬뜩한 구절이 담긴 가사라도 그것이 역사의 일부임을 수용하고 혁명의 전통을 존중하는 프랑스인들의 정서가 오랫동안 축적된 결과였을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와 달리 1853년 대통령이 제안한 경연 대회를 통해 선정된 멕시코 국가의 가사는 조국 수호 전투의 승리와 애국주의적 이상을 염원한 유명 시인의 작품이었다. 함께 부르는 노래의 효과를 간파한 대통령 산타나는 미국에 국토의 절반 이상을 넘겨준 쓰라린 패배 탓에 사기가 꺾인 자국인들의 단합을 이렇게 독려하고자 했다. “우리 땅을 더럽히고 조국의 명예를 모독하려는 외적에게 전쟁을! 피에 젖은 애국의 깃발과 함께 전쟁을! 영광의 기억과 승리의 월계관을 위해 용감하게 투쟁하라!” ‘멕시코인이여, 전쟁의 함성으로’라는 제목의 국가는 그 이듬해 9월 독립기념일에 처음 선보인 뒤 1943년에야 공식 채택되었다.

23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 7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여야 대표들이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다. 이날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_경향DB

사실 ‘님을 위한 행진곡’에는 앞서 언급한 두 국가나 1980년대 5월이면 어김없이 한국의 대학가에서 울려퍼진 ‘5월의 노래’와 달리 ‘붉은 피’나 ‘투쟁’이란 표현이 없다. 논란의 소지가 크지 않을 수 있건만, ‘님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 반대 방침은 한국 사회에서 1950년 ‘6·25전쟁’에 근거한 준거틀(frame of reference)이 1980년 5월의 준거틀에 비해 여전히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는 방증일 것이다. ‘님을 위한 행진곡’이 세대와 지역 간 화합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거나 국민적 유산이 되기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는 근거는 무엇인지, 호국과 보훈의 의미를 너무 좁게 해석해온 과거의 관행이 국민 화합을 방해하는 걸림돌은 아니었을지 돌아봐야 한다.

매년 거행되는 다양한 종류의 기념식과 추모식이 흔히 이미지와 단어를 통해 역사적 기억과 정치적 담론을 만들고자 애쓰는 세력들의 경쟁 무대로 기능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듯하다. 다만 4, 5월에 숨죽였다가 6월에 기를 펴려는 후진적 행태, 달리 말해 호국, 애국, 보훈, 어버이란 낱말을 독점하려는 특정 이념 세력의 욕구를 더 이상 방치해선 안될 것이다.


박구병 | 아주대 교수·서양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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