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慰靈): 죽은 사람의 혼을 위로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오는 27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원폭피해자위령비를 방문할 것인지가 관심사로 떠오른 뒤 뜬금없이 위령에 해당하는 영어를 찾아보았다. 망자를 기억하다(remember)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을 위령의 뜻으로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미국 당국자들은 오바마가 히로시마에서 무고하게 죽은 모든 사람들을 예우할(honor) 것이라고 했다. 오바마는 미군이 사망하면 애도성명을 내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에도 ‘예우한다’는 표현을 잘 쓴다. 하지만 이 역시 위령과는 다르다. 미국에서는 누가 죽었을 때 위로하는 대상이 망자의 혼이라기보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유족, 즉 산 사람인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쓰는 의미의 위령은 오바마에게 그다지 친숙한 개념이라고 볼 수는 없다.
현대사에서 그 어떤 나라보다 많은 전쟁을 수행한 미국은 전쟁 때 자국이 했던 행동에 대해 사과한 적이 없다. ‘정의로운 전쟁’의 와중에 무고한 사람들이 숨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세계질서’를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것이 국가적 차원의 논리다. 지난해 아프가니스탄 전장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국경없는의사회 소속 의료진과 환자 수십명이 숨진 사건을 두고 보여준 태도도 그렇다.그런 점에서 나는 오바마가 히로시마를 방문하기로 결정했을 때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출생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도의적 책임감을 느끼고 있고 그 책임을 통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원폭에 대해 많은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복잡한 심사를 떠나 존중할 만한 일이다. 그의 히로시마 방문은 국내 정치적 상황을 볼 때 유리한 결정이 아니다. 그의 전임자 열 명이 가지 않은 길이라는 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히로시마 원폭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여론이 점점 약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미국인 56%가 그것이 정당했다고 믿고 있다. 미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은 그가 뭐라고 말해도 사과로 간주되기 쉽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_연합뉴스
그는 이번에 히로시마에서 긴 연설보다 짧고 개인적인 발언을 할 것이라고 한다. 원폭 투하 결정이 정당했는지는 다시 판단하지 않을 것이며, 사과로 비치는 언행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다만 수십만명의 일본인과 수만명의 조선인들, 심지어 수십명의 미군 전쟁포로들까지 원폭 투하로 숨졌다는 점을 들어 이 모든 사람들을 예우할 것이라고 한다.
한국 정부는 오바마가 히로시마에 간다면 원폭평화기념비에서 걸어서 몇 백 걸음 떨어진 한국인위령비도 찾기를 권유했다. 이에 미 당국자들은 오바마가 히로시마에 머무르는 시간이 짧고 정상의 동선은 경호 등이 관계된 복잡한 문제여서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번 방문은 숨진 모든 이들을 예우하기 위한 것인 만큼 한국인위령비에 가고 안 가고는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 말한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에 한국인위령비가 따로 세워져 있는 이유는 자명하다. 원폭의 불길은 일본인, 조선인을 차별하지 않고 죽였지만, 조선인들은 거기 포함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 중에는 강제징용자도 있었고 식민지 현실 속에서 먹고살기 어려워 고향을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인들만 죽었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한국인 피해자들의 존재는 각국의 국가적 내러티브에 가려져 있던 제2차 세계대전 역사의 어두운 측면을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오바마가 ‘그래도 죽은 사람보다는 산 사람’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서 살아남은 사람을 위로해야겠다면, 그 대상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아니라 한국과 일본에 생존해 있는 ‘피폭자(被爆者)’들임을 기억하길 바란다. 동행하는 아베가 혹시 한국인위령비에 가기를 꺼린다면 당신이 그의 손을 이끌고 함께 가자고 하길 바란다.
손제민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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