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현실과 이상의 경계에 선 사회통합(Inclusion)과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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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기고]현실과 이상의 경계에 선 사회통합(Inclusion)과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by 경향글로벌칼럼 2016. 5. 31.

최근 언론에 연일 다뤄지고 있는 2016년 미(美)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우세로 예상됐던 것과는 달리 클린턴 측은 난국에 처하고 있는 듯하다. 반면, 트럼프는 일명 트럼피즘(Trumpism)의 한계를 ‘신(新) 고립주의’가 아닌 철저한 국익 중심의 ‘현실주의’라고 주장하며 민심을 재빠르게 잡아가고 있다. 이는 최근 실시되었던 유권자 사전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트럼프가 46%로 44%인 클린턴 전 장관을 앞서는 수치를 허용했다.

사실상, 이 대선 후보들의 정책은 확연히 구분된다. 민주당 후보인 클린턴의 경우에는 ‘통합(Inclusion)‘을 강조한다. 소수인종이나 종교, 성적 정체성에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포용하여 미국사회에 통합하는 정책을 말한다.

트럼프 후보자의 경우에는 미국사회 주류인 백인 서민계층의 호소를 담아 국가부채와 불법 이민자들의 일자리 잠식을 막는 미국 우선주의를 주창한다. 일명 트럼피즘(Trumpism)으로도 불리는데, 국수주의(國粹主義)를 통해 유권자를 끌어 모으는 방식이다.

미국인들이 이들 두 대선 후보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그들이 생각할 때 이 후보들이 지금보다 더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통합과 국수주의 중 하나는 미국인들이 생각할 때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방법론일 것이다.

클린턴과 트럼프, 중요한 건 이들 후보들의 정책에 대해 어떤 게 옳고 어떤 게 그른지를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다. 다만, 행복한 삶인 복지(福祉)를 위해서는 비장애인이나 장애인들 사이에서 차별을 최소화시키는 일이 요구된다. 사회통합으로 해석되는 ‘인클루전(Inclusion)’은 좋은 예가 된다.

언제부터인가 하나였던 인류는 백인과 유색인종, 저학력자와 고학력자, 엘리트와 서민, 자국인과 이민자, 젊은이와 고령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비장애인과 장애인 등으로 구별돼 왔다. 우리나라의 복지관 등 장애인 이용시설을 비롯해 생활시설 대부분은 그렇게 구분 짓는 것에 익숙해 있다.

물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전문적인 서비스 기능을 수행하는 곳으로써의 고유의 기능이나 역할을 폄하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사회 복귀를 위한 준비 과정을 밟도록 한다는 당초 취지를 우선순위로 본다면 순기능일수도 있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 그들이 사는 지역사회 안에서 그 자체로 존재를 인정받고 권리를 누려야할 사람들이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지역사회의 다양한 자원들과 상호작용이 배제된 채 제한된 환경에서만 복지 서비스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미국 공화당 대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_AP연합뉴스


더욱이 정부나 지자체의 보조금을 받는 시설이나 기관들은 그 정도가 심하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사람이 아닌, 우리 이웃집 어르신이나 옆집 언니 동생으로 자신들이 거주하는 지역사회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습득할 수 있는 프로그램보다는 시설이 법적 기준에 잘 맞는지, 신고를 제대로 했는지 안했는지, 그리고 몇 회기의 재활서비스를 제공했는지 등 시설평가 준비와 보조금 재정 감사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게 현실이다. 이런 환경에서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지역사회로부터 더 분리되고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예를 들어 장애인복지관이나 관련 시설에서는 무료 이·미용서비스를 관내에서 진행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미용사 협회 등 이·미용사의 자원봉사나 비전문가인 보호자의 손에 의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정해진 요일과 시간에 서비스가 진행된다. 물론 장애를 가진 이용자들은 이·미용실을 구태여 발품 팔며 찾아다닐 필요가 없으니 편리한 점도 있다. 그러나 이런 관행은 이미 그들을 지역사회로부터 배재된 특정인으로 구분 짓는 것이다. 그들도 가능한 날짜와 시간에 원하는 동네 이·미용실을 찾아가서 좋아하는 헤어스타일을 주문하고 이·미용 전문가들의 서비스를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런 관행을 깨기란 쉽지만은 않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몸에 배인 습관과 사회적 편견의 시선을 극복하고, 지역사회역시 아직은 그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독일에서는 가톨릭사회복지회(Caritas)를 중심으로 ‘인클루전’이라는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고 전 독일의 복지현장에서 실천하고 있다. 이들은 인클루전을 ‘우리 모두에게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이미 구분되어있지 않고 포함되어있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고 자립하여 생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진정한 사회통합(Inclusion) 이라는 얘기다.

얼마 전 미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공동선 추구와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어려운 이웃(장애자, 이민자, 노숙자, 복역자)을 돌보는 것이 정치의 최고 목표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적 효율성과 물질적 안락이 성공의 기준이 되는 현대인들에게 당연히 그들이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사회의 각 주체들이 정체성과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연대의 감정을 가지고 같이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면 행복한 삶인 복지의 길은 이루어 질 수 있다. 이것이 잘 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정치인들의 역할이 아닌가 싶다. 한 책임 있는 인간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는 믿음을 줄 때 시민들은 그 대선주자 후보의 손을 들어줄 것은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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