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팔레스타인 해방과 투쟁의 상징이었던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사망한 지 9주기가 되는 날이다. 테러리스트의 대부였던 아라파트에게 노벨평화상을 안겨준 오슬로 평화협정이 체결된 지도 20년이 흘렀다.
그런데 최근 아라파트가 독살되었다는 정황증거가 속속 밝혀지면서 아랍세계는 충격에 휩싸이고 있다. 그의 유해를 정밀 감식한 스위스 연구진이 평균치의 18배 이상에 이르는 강력한 독성물질인 플로늄을 검출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아라파트 사후 리더십을 잃고 표류하면서 이스라엘에 양보 일변도의 협상에 매달리는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에 대한 불신과 대이스라엘 전략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은 반세기에 걸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와 공존으로 가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졌다. ‘땅과 평화의 교환’ 합의로 팔레스타인 투쟁기구들은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무력해방을 포기하는 대신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팔레스타인 아랍들을 위한 자치와 독립을 보장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그 점령지는 1967년 3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이 불법으로 점령한 땅으로 유엔안보리 결의안 242조 등에 의해 국제법상 어차피 돌려줘야 할 아랍의 영토였다.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팔레스타인 독립기구들은 ‘해방’이란 단어를 삭제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가 되었다.
이스라엘 대통령과 미국 국무장관 팔레스타인 대통령 (경향DB)
20년이 지난 오늘 오슬로 평화협정은 실패했다. ‘해방’을 포기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거의 완전히 이스라엘에 예속된 상태가 되었다. 물과 전기 등 생필품은 물론 재정과 치안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에 대한 의존이 심화되었다. 평화협상의 이행과정에서 어떤 다른 조건보다 우선적으로 지켜냈어야 할 영토 보전에도 실패했다. 점령지에 들어서고 있는 확대일로의 유대인 정착촌 문제다.
중동전문가인 미국 컬럼비아대학 요셉 마사드 교수의 분석에 의하면 지금까지 이스라엘로부터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흘러들어간 재정지원이 230억달러를 넘어섰다고 한다. 그 대가로 이스라엘은 서안지구를 중심으로 150개가 넘는 정착촌을 건설해 현재 50만명가량의 유대인들이 이주해 살고 있다.
오슬로 평화협정 이후 오히려 유대인 정착지 숫자는 세 배나 늘어났다. 정교한 시나리오에 따라 이스라엘은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으로 군대를 주둔시키고 테러방지를 핑계로 불법으로 분리장벽을 쌓아 점령지를 넘겨주지 않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압바스 행정부의 대응은 거의 무능에 가깝다. 조국을 팔아먹었다는 하마스를 중심으로 하는 팔레스타인 강경파들의 주장도 이러한 배경에서 연유한다.
하마스의 대이스라엘 강경기조는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테러조직이라는 낙인으로 돌아왔고, 이스라엘은 물론 그들과 연대한 동족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이집트 무바라크 정권(지금은 알 시시 쿠데타 정권)으로부터도 압박당하는 3중의 고통 속에서 고독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평화라는 이름을 내걸고 노벨평화상을 양산했던 오슬로의 합의가 20년 후, 팔레스타인 영토가 더욱 줄어들고, 더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죽음을 맞고, 더 가난한 삶과 더 많은 규제, 거주이동이 제한되면서 총체적인 예속상태가 심화되었다면 그것은 완벽한 실패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점령지 내의 유대인 정착촌 건설은 중동평화구도의 가장 뜨거운 감자다. 명백한 불법임에도, 심지어 미국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당국은 거침없이 정착촌 건설을 강행하고 있다.
점령지 내의 유대인 정착촌 건설의 자제를 당부하는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의 중동순방을 앞두고 지난주 네타야후 이스라엘 총리는 보란 듯이 서안지구에 3500가구의 신규 정착촌 건설을 발표했다. 이 정도면 거의 막가파식이다. 철벽정책으로 아랍인들을 몰아붙여야만 비로소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창한 20세기 초 호전적 시오니즘의 창시자인 블라디미르 자보틴스키(1890~1940)의 강경 아랍정책이 그대로 실현되는 듯한 착잡함을 금할 수 없다. 실리와 투쟁을 병행하면서 진정한 평화를 꿈꿨던 아라파트의 리더십이 더욱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이희수 | 한양대 교수·중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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