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유령처럼 떠도는 ‘한반도 비핵화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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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기고]유령처럼 떠도는 ‘한반도 비핵화 선언’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2. 27.

1953년 형법에 만들어진 간통죄는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폐지됐다. 하지만 20여년 전에 만들어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유령처럼 죽지 않고 여전히 한반도를 떠돌고 있다. 비핵화 공동선언의 연원을 거슬러 가보자. 때는 1991년 여름과 가을 사이, 한·미 양국은 하와이에서 남한 내에 배치된 전술핵 철수와 관련해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노태우 정부의 김종휘 청와대 안보수석과 아버지 부시 행정부의 국방차관 폴 월포위츠가 각각 대표로 나섰다. 이 회동 결과로 부시 대통령은 1991년 9월27일 남한 내의 전술핵 철수를 공식 발표했다. 노태우 정권은 같은 해 12월18일 ‘대한민국 어디에도 어떤 형태로든 핵무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핵부재를 선언했다.

북한도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핵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남북 간 실무대표접촉이 1991년 12월26일부터 31일까지 판문점에서 열렸다. 여기서 북한은 그동안 주장해오던 비핵지대화 주장을 철회하고, 우리가 마련한 비핵화 선언에 응하면서 합의에 이르게 된다. 이어서 1992년 1월20일 남한의 정원식 총리와 북한의 연형묵 총리가 서명하고 남북고위급회담 6차 회담에서 서명한 문본을 교환하면서 2월19일자로 정식 발효됐다.

그 이후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다. 하지만 변한 것은 강산만이 아니었다. 그 사이에 북한은 2006년, 2009년 그리고 2013년에 핵실험을 했다. 세 차례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아니한다’는 비핵화 공동선언의 첫째 조항을 보란 듯이 내팽개쳤다. 북한은 결과적으로 ‘남과 북은 핵에너지를 오직 평화적 목적에만 이용한다’와 ‘남과 북은 핵 재처리 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아니한다’는 나머지 조항들도 위반했다.

2007년, 당시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한반도의 비핵화 논의를 위해 북한으로 건너가 조선반도 북한 외무성미주국 리근국장과 만났었다. (출처 : 경향DB)


하지만 우리만 동 선언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마저 비핵화 공동선언이 유효하지 않다고 선언할 경우 오히려 북한 핵무장을 공고화시킬 것이라는 주장이 정부 내에서 우세하다. 그리고 이들은 우리의 핵비확산 정책에 대한 외부의 의심과 미국 등으로부터 외교적 압력이 높아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미국이 비핵화 공동선언의 이른바 ‘고스트 라이터’(ghost writer)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는 짧은 생각이다.

첫째, 우리는 이미 누더기가 된 비핵화 공동선언을 대체하는 성명서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지 아니하고 동 선언만 폐기한다면 농축과 재처리를 포함하는 핵무기 물질 보유에 대한 국제사회의 의심을 충분히 살 만하다. 동시에 국민적 합의를 모은다는 차원에서 민의의 전당인 국회도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둘째, 대체할 문건에는 핵비확산에 대한 우리의 독자적인 의지가 담겨져야 함은 물론이다. 원자력 기술을 포함하는 플랜트 수출을 고려한다면 세계가 보편적으로 수용하는 기준에 맞는 비확산 관련 법들을 새롭게 제정하거나 기존의 각종 규정들도 신속하게 재정비하여야 한다. 무엇보다 오늘날 세계경제의 질서가 책임은 지지 않고 권리만을 주장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핵비확산을 위한 정책적 고려를 한층 강화하여야 한다. 이를테면 핵무기 보유는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는 국민적 합의가 지금보다 훨씬 넓게 퍼져 나가야 한다. 핵비확산이 국제규범으로 자리 잡아가는 상황에서 우리도 하나의 운동으로서 비확산 문화 프레임을 잡아 나가야 한다. 조금씩 성숙해져 가는 시민운동이 있기에 하는 말이다.


이병철 | 평화협력원 비확산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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