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권 한계선에서 145㎞ 떨어진 스웨덴의 작은 도시 키루나. 겨울이면 평균온도가 영하 15도 아래로 내려가는 혹한에 햇빛도 잘 들지 않는 곳이다. 이 척박한 도시에 2만3000여명이 모여 산다. 도시 아래 묻혀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철광석 때문이다. 이곳에는 세계 최대의 철광석 탄광이 있다. 유럽에서 나는 철광석의 90%는 이곳에서 생산되는데 하루에 에펠탑을 6개 만들 수 있는 규모다. 1900년대 초반 철광석이 채굴되면서 키루나는 탄생했다.
그러나 도시의 번영을 가져다준 탄광은 이제 도시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대대적인 철광석 채굴로 지반이 침하되면서 도시는 가라앉고 있다. 도시의 위기는 탄광을 운영하는 국영광산회사가 탄광 갱도를 더 깊이 파내려가기 시작한 2004년부터 본격화됐다. 도시 곳곳의 땅에 쩍쩍 금이 가고 싱크홀이 생겼다. 2050년이면 도시가 모두 지하탄광에 삼켜질 것으로 예측됐다. 더 이상의 채굴을 관두든지 아니면 모두 떠나야 했다.
키루나 시 당국은 도시 경제의 동맥인 탄광을 포기하지 않는 대신 전례 없는 이사를 택했다. 인구 2만3000여명이 사는 도시를 2033년까지 통째로 동쪽으로 3.2㎞ 옮기는 방안이다. 어딘가로 강제이주를 당하는 것은 예전의 삶이 뿌리 뽑히는 일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시위나 주민과 행정당국 간 지루한 소송이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역사상 가장 민주적인 이주’로 불린다. 시 당국이 단순히 피해를 보상하고 집을 옮겨주는 수준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의 질을 약속하는 도시 재건방안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스웨덴 키루나마을에서 오존층파괴현상을 조사키 위해 이륙을 준비하고 있는 대형기구_경향DB
키루나 탄광을 운영하는 국영철광회사 루오사바라-키루나바라는 키루나 이주를 위한 아이디어를 모으기 위해 공식 입찰에 부쳤다. 그렇게 선정된 것이 키루나 포에버(Kiruna 4 ever) 프로젝트다. 2014년 1월부터 시작된 이 프로젝트에는 50억크로나(약 7100억원)가 투입된다. 이 프로젝트를 관통하는 것은 보존과 재창조다. 철도역, 시청 등 기존 키루나시의 주요 건물 20개는 그대로 분해해 새 곳으로 옮겨서 조립한다. 스웨덴의 소수민족 사미족의 천막을 본떠 1912년에 지어진 붉은 목조교회도 같은 방식을 따르게 된다. 1958년부터 시청지붕 위에 있던 철시계탑도 그대로 가져와 새 광장 한복판에 놓이게 된다. 지역사회를 엮어주는 학교, 마을회관, 도서관, 탁아소, 스포츠센터 등은 주민 의견을 수렴해 새로 만들어진다.
시 당국은 헐린 집에서 나온 각종 건축 자재를 모아놓고 누구나 재활용에 가져다 쓸 수 있는 키루나 포털을 만든다. 비용과 쓰레기를 줄이려는 목적뿐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서로 공유하기 위한 장치다. 기존에 듬성듬성 존재하던 주거지역에는 도심 접근성과 밀도를 높이기 위해 마당을 공유하는 저층 아파트가 들어선다. 루오사바라-키루나바라는 주민들에게 원래 살던 주택의 25%를 더 얹어 보상금을 받거나 새로 지어지는 집을 받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세입자도 배려해 임차료 보조금을 받아 저렴하게 집을 빌릴 수 있도록 했다. 키루나시는 격년축제인 키루나 비엔날레를 기획 중이다. 지구온난화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는 등 키루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다른 도시를 초대해 경험을 공유하는 행사다.
지난 17일 스웨덴 정부는 ‘여기는 키루나: 도시를 옮기는 법’이라는 영상을 공개했다. 이 영상에 등장하는 키루나 사람들에게는 한국에서 재개발로 산동네가 사라지고, 댐 건설로 마을이 통째로 물에 잠길 때마다 보았던 주민들의 무력한 표정은 찾기 어렵다. 이유는 간단하다. 약간의 보상금을 주고 알아서 하라는 대신 공동체를 그대로 재건하기 때문이다. 번듯한 새 건물을 지어주는 것뿐 아니라 주민의 감정과 도시가 가진 무형의 자산을 배려하기 때문이다. ‘키루나 포에버’를 맡은 건축업체는 언론에 이렇게 말했다. “도시를 규정하는 것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옮겨야 하는 것은 키루나를 묶어주는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유대와 관계다.”
이인숙 | 국제부 sook9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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