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어제 재외공관장 회의 개회사에서 “국익의 관점에서 우리가 옳다고 최종 판단하면 분명한 중심과 균형 감각을 갖고 휘둘리지
말고 밀고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주장이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의 사이에 낀 약소국이라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역량을 저평가했다. 겉으로 중견국을 자처하면서도 심화되는 미·중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미국에 의존하거나 이쪽저쪽
눈치를 보았던 것이 한국 외교의 실상이었다. 이런 현실에서 중심과 균형은 한국 외교의 핵심 가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윤 장관은 그 가치를 실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의 의미가 아니라, 그걸 실천하고 있기에 자랑스럽다는 의미로 중심과
균형을 거론했다. 나아가 그는 “우리는 종속변수가 아니라 독립변수”라며 “집채만 한 쓰나미가 닥쳐와도 뚫고 나갈 수 있다”는
주장도 했다. 외교 난제를 잘 헤쳐나가고 있다는 일종의 자화자찬으로 들린다. 미국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러시아 전승절 70주년 기념식 참석 문제를 미루고 미루던 일을 그가 벌써 잊은 것 같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과 김장수 주중대사(앞줄 왼쪽부터) 등 재외공관장들이 30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15년도 재외공관장 만찬행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다시 상기하자면, 한국의 AIIB 가입에는 중심과 균형이 없었다. 영국 등 미 동맹국이 잇달아 가입한 뒤 미국의 견제 의미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서, 그것도 미국으로부터 각국이 알아서 결정할 문제라는 묵시적 허락을 받고서야 가입했다. 그런데도 마치
주권적 결단을 내린 것처럼 포장했다. 그는 이런 지적을 “고뇌가 없는 무책임한 비판”이라며 “그리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평가절하했다. 편승 외교, 무임승차 외교로 주변 환경을 헤쳐나갈 역량이 없음을 드러낸 것에 대해 반성하기는커녕 역공을 편 것이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의 무기한 연기로 안보 책임을 포기한 박근혜 정부가 자기 약점을 덮으려 이렇게까지 애쓰는 모습을 보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정부는 미국의 반대를 의식해 러시아 전승절 참석 여부도 미루고 있다. 일반적인 관측은 미국 압력 때문에 결국 참석을 포기할
것이라고 한다. 미국의 고고도 미사일방어 체계(THAAD·사드) 한국 배치에 대해서도 윤 장관은 “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면
중국·러시아 등 오해가 있는 나라들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될 것”이라며 배치 추진을 시사했다. 미국의 요구를 국익과 동일시하는
이런 태도를 보이고도 그는 그제 KBS <일요진단>에서 “우리가 미국을 너무 의식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런 인식으로는 미국의 승인·묵인 없이 독립적으로 결정하지 못하는 한국 외교의 현실을 바로잡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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