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인 경제 패권 경쟁에서 미국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아시아 국가는 물론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독일 등 유럽의 서방국가들도 참여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미국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던 우리나라도 엊그제 참여하기로 최종적인 가닥을 잡았다. 아시아에서는 일본만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지만 조만간 참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미국은 그동안 서방 동맹국들의 AIIB 참여를 저지하려 무던히 애썼으나 결국 허탕으로 끝나고 말았다. 미국은 중국같이 불투명한 국가가 주도하는 은행의 저의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며 서방 동맹국의 참여를 간곡히 만류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 동맹국이 이를 뿌리치고 줄행랑을 쳤다. 뉴욕타임스는 그중 최고의 동맹인 영국의 배신을 미국에 대한 모욕(affront)이라고까지 평가했다.
이를 두고 국제 외교에서 단지 미국의 체면을 구기게 됐다고 가벼이 여기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경솔한 판단이다. 왜냐하면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번 사태는 브레턴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로 세계를 경제적으로 제패했던 미국이 어쩌면 그 권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고조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에 매우 위중한 것이다.
최희남 기획재정부 국제경제관리관이 27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기자브리핑에서 한국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참여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_ 연합뉴스
1944년 7월 미국 뉴햄프셔 주 브레턴우즈의 마운트 워싱턴호텔에서 20세기 가장 역사적인 국제회의가 열린다. 바로 거기서 미국의 달러는 전 세계 화폐를 대표하는 기축통화(reserve currency)로 결정된다. 이를 통괄하기 위해 IMF와 IBRD 등의 세계은행도 설립된다. 바야흐로 미국의 패권은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패권은 금권을 쥐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이후 미국은 단순히 달러를 찍어내면서, 즉 기축통화의 발권력을 이용해 세계 1위의 강국으로 군림해 왔다.
달러로 세계를 제패하는 것은 분명 꿀처럼 달콤한 일이다. 그러나 달콤한 꿀도 많이 먹으면 독이 되는 법. 거기엔 위험도 동시에 도사린다. 이를 정확히 간파한 사람이 있었으니 벨기에 태생의 미국 경제학자 로버트 트리핀이다. 그는 달러가 기축통화가 된 이상 전 세계에서 사용되어야 하기에 충분한 유동성이 공급되어야 하고, 그것은 무역을 통해 그렇게 되니 결국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갈수록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이를 막으려 한다면 달러의 유동성이 공급되지 못하니, 결국 기축통화로 머무르려면 만성 적자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달러가 이렇게 계속 공급되면 달러의 가치는 하락하고 결국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신뢰도는 하락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미국으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른바 ‘트리핀의 딜레마’다. 결국 그 과정의 끝은 기축통화인 달러의 종말이다. 모든 것에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것은 당연지사. 트리핀이 그 과정을 친절히 설명해준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이것도 모자라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제3차 양적완화(QE)를 통해 엄청나게 달러를 찍어 냈다. 달러의 수명 단축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이를 국제사회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다만 겉으로만 드러내지 않았을 뿐. 왜냐하면 분명한 어조로 이를 대놓고 드러낸다면 그것은 현재 국제 금융체제의 파국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조용히 움직인 것이다.
따라서 이번 사태에 대한 미국이 느끼는 위기감의 본질은 바로 여기서 찾아야 한다. 즉 혹시 달러가 기축통화의 권좌에서 내려오는 신호탄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의 고조다. 국제사회에는 국익과 미래를 위해서는 동맹이고 뭐도 없는 이 냉혹한 현실을 우리는 지금 확실히 목도하고 있다.
김광기 | 경북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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