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는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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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시계는 돌아간다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10. 2.

새로운 스타를 찾아 헤매는 언론들에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떠오르는 총아다. 1980년생 여성이 국가 최고지도자 자리에 올랐다는 것부터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노동당 소속의 아던은 지난해 10월 총리로 취임해 관습을 깨는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동거 파트너와 아기를 가진 아던은 지난 6월 딸을 출산했고, 육아휴직 중이던 7월 가족 관련 정책을 공개했다. 장소는 그의 집 소파였고 매체는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을 통해서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의 아던은 딸을 품에 안은 채 유급 육아휴직 확대, 양육수당 신설 등 새 정책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가운데)가 여성 참정권 인정 125주년 기념일인 19일(현지시간) 오클랜드 아오테아 광장에서 열린 기념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뉴질랜드는 1893년 세계 최초로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했다. 아던 총리는 연설에서 “오늘날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참정권 운동에 참여한) 이 여성들 덕분”이라며 “성평등 달성을 나의 최우선 순위에 놓음으로써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겠다”고 말했다. AP연합뉴스

 

출산을 앞둔 지난 4월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버킹엄궁에서 주최한 만찬에 마오리족 전통 의상 ‘코로와이’를 입고 참석했다. 의상의 의미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 공세가 뒤따랐음은 물론이다. 아던은 지난달 미국 뉴욕에서 개막한 유엔 총회에서도 어린 딸을 동반하고 회의장에 입장해 주목받았다.

 

여성 정치인이 아기를 데리고 출근하는 게 처음은 아니다. 2010년 이탈리아의 여성 의원이 유럽의회에 어린 딸을 동반해 화제가 됐다. 그러나 국가 정상이 유엔 총회에 아기를 대동한 것은 전례가 없다. 아던이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새 역사가 되고 있는 셈이다.

 

비판도 없지 않다. 아던은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는 권력자다. 유엔까지 아기를 안고 간 것은 아기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모유 수유를 포기하는 게 싫어서였다. 지난달 초 나우루에서 태평양 제도 포럼이 열렸을 때 아던은 아기와 떨어지는 시간을 최소화하려고 전체 일정 중 하루만 소화했다. 이를 위해 당일치기 항공편을 별도 마련하도록 해 ‘혈세를 낭비했다’는 야당의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외신들은 아던을 새로운 유형의 21세기 지도자로 치켜세우고 있다. 진보적이고 온화한 카리스마를 지녔으며 결혼하지 않은 워킹맘 정상의 출현은 전에 없던 참신한 정치문화의 탄생을 기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던이 유엔 총회 연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의 고립주의를 비판했던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애석하게도 미국에선 20세기의 구태가 되풀이됐다. 이날 미 상원 법제사법위원회에선 브렛 캐버노 연방대법관 지명자에 대한 청문회가 열렸다. 전국에 생중계된 이 청문회에는 크리스틴 포드 팰로앨토대 교수가 고교생이던 1982년 한 파티에서 캐버노에게 당했던 성폭력을 증언했다.

 

캐버노는 최선을 다해 포드 교수의 증언을 부인했고 “내 가족과 이름은 가짜 고발로 완전히 망가졌다”고 말했다. 과거의 잘못이 드러나 출세 길이 막힐 위기에 처한 남성이 여성 고발자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는 장면은 낯익다. 한국이었다면 포드 교수가 그날 짧은 치마를 입었다거나, 그러길래 왜 남자들이 많은 파티에서 술을 마셨느냐는 역공이 이어졌을 것이다.

 

캐버노와 그를 비호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아무도 여성 고발자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던 지난 세기를 그리워하겠지만 세계는 느린 걸음일지라도 진보하고 있다. 여성들은 성폭력 고발 운동 ‘미투’가 유력 남성들을 쓰러뜨리는 것을 목도했다. 30대 여성 정상이 아기를 안고 유엔을 활보하는 시대 또한 이전과 같은 세상일 수 없다.

 

미국 전국여성법률센터의 패티마 고스 그레이브스 대표는 한 인터뷰에서 “여성들이 (의회를) 지켜보고 있다. 우리는 싸울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50만명이 워싱턴 거리를 뒤덮었던 지난해 ‘여성들의 행진’에 필적할 규모의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캐버노를 대법관 자리에 앉히는 데 성공하더라도 대가가 뒤따를 것이다. 11월 중간선거가 다가오고 있다.

 

<최희진 국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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