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가지 않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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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아침을 열며]가지 않은 길

by 경향글로벌칼럼 2020. 2. 3.

한반도는 차갑게 식어버렸다. 3차례의 남북정상회담, 2차례의 북·미 정상회담을 지켜보면서 느꼈던 두근거림과 달뜬 기대, 평화에 대한 열망은 가라앉은 지 오래다. 남북의 지도자가 판문점 도보다리에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연출하고, 독설을 주고받았던 북·미 지도자가 서로 우의를 다졌던 몇몇 장면들이 아득한 옛일 같다.


북한은 ‘새로운 길’을 예고했다. 미국은 외교적 해법을 강조하지만 대화할 진짜 의지는 없어보인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때 ‘중재자’로 성가를 높였지만, 지금은 종영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존재감이 없다. 북한 매체들은 문 대통령을 수차례 조롱했으며, “남조선 당국자들과 더 이상 할 말도 없으며, 다시 마주 앉을 생각도 없다”고 자른다. 물밑에서 들리는 정보들을 종합하면 전망은 어둡다. 그럼에도 남·북·미가 연출했던 몇몇 장면과 성취들을 허비하기엔 아깝다. 왜 이렇게 됐을까. 되짚어봐야 한다.


따지고 보면 북·미 모두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이 결여됐던 것이 문제의 출발점이었다고 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나치게 정치적이었다. 바람 잘날 없는 내치로 욕을 먹던 그로선 이 모든 것을 가리는 이벤트가 필요했을 것이다. 잘되면 노벨 평화상도 탈 수 있고, 재선에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장사꾼 트럼프의 머릿속에 한반도 평화에 대한 큰 그림이 있기나 했을까. 탄핵 등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내놓은 조악한 ‘중동평화구상’을 대단한 성취인 양 자랑하는 모습을 보면 안다.


더군다나 트럼프는 북한을 너무 몰랐다.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주는 것만으로도 북한이 감격할 줄 알았다. 춥고 배고픈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약속만 하면 냉큼 핵을 포기할 거라 믿었다. 붕괴 공포감에 시달려온 북한이 핵을 체제유지의 근본으로 여긴다는 것도 제대로 몰랐다. 이에 대해선 미국 언론도 지적한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해 12월22일 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완전한 비핵화’ 개념을 규정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북한에 뒤섞인 메시지를 보냈고, 이행할 수 없는 약속도 너무 많이 했다고 했다.


북한도 진지한 비핵화 의지를 가지고 협상에 나섰을지 의심스럽다.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에게 “내 아이들이 핵을 지닌 채 평생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이 말을 믿었다. 한반도 평화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도 그의 비핵화 진정성을 믿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 위원장의 표정은 금세 바뀌었다. 협상이 교착되고 제재완화 등이 이뤄지지 않자 미사일 발사 등 무력시위에 손댔다. 김 위원장은 시정연설에서 “핵무장력의 급속한 발전”을 언급했으며, 협상이 잘되는 듯 했을 때 깍듯이 대했던 문 대통령을 “오지랖 넓은 중재자”라고 했다.


미국의 상응조치가 없고 제재완화를 끌어내려는 남측 노력이 성과를 내지 못했더라도, 비핵화 의지가 진정이었다면, 북한이 그렇게 쉽게 과거 행태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기대했던 여권 관계자들도 고개를 젓는다. 비핵화 협상과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북한이 핵동결 정도의 조치로 국제사회 대북제재에서 벗어나고, 정상국가로 인정받겠다는 계산을 한 것 같다”고 했다. 핵 실험과 미사일 발사 중단, 영변 핵 폐기 등 몇 가지 눈에 보이는 이벤트를 한다면 핵 이슈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성과에 목마른 트럼프를 대충 어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결국 지금의 교착은 양쪽 모두 진심으로 협상에 임하지 않은 결과로 보여진다. 출발부터 틀렸으니, 그 이후가 제대로 전개되기 쉽지 않다. 단계적·동시적 비핵화 해법을 둘러싼 논쟁,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개념 차이 등 기술적 쟁점들이 거론되지만 근본은 잘못된 출발에 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고, 그동안의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다. 북·미가 내켜하지 않더라도, 테이블에 다시 않을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북·미도 이제와서 포기한다면 본전 생각이 나지 않겠는가. 그 틈을 파고들어야 한다. 


결국 한반도 당사자인 정부가 나설 수밖에 없다. 북한 개별관광 추진 등 정부의 대북 정책 독자 드라이브도 이런 절박함에서 나왔을 것이다. 미국이 딴지를 걸고, 북한이 냉대하고, 국내 보수세력이 비판해도, 주춤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반도에 잠시나마 드리웠던 평화의 햇살에 박수를 보냈던 국제사회 다수 여론은 박수를 칠 것이다. 가지 않은 길이지만 뚜벅뚜벅 걸어야 한다.


<이용욱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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