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봉인 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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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여적]봉인 딱지

by 경향글로벌칼럼 2020. 2. 28.

14세기 흑사병이 돌자 베네치아는 항구를 닫았다. 정박하려는 배들은 선상에서 검역당국의 검사를 받고 허가를 받아야만 입항할 수 있었다. 그렇지 못하면 40일간 항구 밖에서 격리되었다. 검역소(quarantine)는 이탈리아어로 ‘40일간’을 뜻하는 quarantina에서 기원한다. 오늘날에는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검역소라는 의미뿐 아니라 격리, 교통 차단 등 다양하게 쓰인다.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부쩍 많이 오르내리는 말이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자 당국에서는 ‘코호트 격리(cohort quarantine)’를 통한 집중관리에 나섰다. 코호트는 고대 로마시대에 360~800명으로 구성된 군대 세부조직을 일컫는 말이다. 사회학에서는 같은 시기에 특정한 사건을 함께 겪은 사람들의 집단을 일컫기도 한다. 코호트 격리는 환자와 의료진을 동일 집단으로 간주하고 격리를 통해 전염병을 관리하는 것이다. 집중관리로 전염병의 확산 위험을 줄이는 조치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가 유행할 때 대전 대청병원을 시작으로 전국 10여개 병원에서 운영된 바 있다. 당시 의료진은 메르스와 싸워야 할 뿐 아니라 환자도 다독여야 하는 힘든 시기를 보냈다.


최근 부산 두 곳의 요양병원에서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추가로 코호트 격리가 이뤄졌다. 요양병원 특성상 기저질환이 있는 고령자가 많은 상황에서 종사자 가운데 환자가 나왔기 때문이다. 코호트 격리가 고통인 이유는 외부와의 강제적인 차단 때문이다. 범죄자를 교화시설에 가두는 것이 형벌인 까닭은 격리를 통해 자유를 빼앗기고 세상과 단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격리는 법과 절차에 따라 최소한으로 신중하게 이뤄져야 한다.


중국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 26일 중국 장쑤성 쑤저우에 사는 우리 교민의 아파트 문과 벽에 봉인 딱지가 붙는 일이 발생했다. 아파트 단지 주민위원회가 교민이 나오지 못하도록 봉인한 것이다. 주민위원회는 “14일 뒤 문을 열어주겠다” “음식은 사흘에 한 번씩 주민위원회를 통해 배달받아야 한다”고 통보했다고 한다. 유사한 일은 상하이와 베이징에서도 발생했다. 코로나19에 대한 공포와 이기심이 이성을 마비시킨 것 같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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