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주간 각국 정치 지도자들의 말 가운데 주목을 끈 두 단어를 고르라면, ‘배신’과 ‘은혜’가 아닐까 싶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6월26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한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 감리교회에서 열린 총기난사 사건 희생자 9명의 장례식 추도 연설에서 은혜라는 단어를 35번이나 사용했다고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인종적 편견에 따른 혐오 범죄가 어떻게 미국을 해치고 있는지 드러냈다고 개탄하면서 “증오에 눈이 멀어 클레멘타 핑크니 목사와 성경공부 모임을 감싸고 있던 은혜를 보지 못한” 20대 백인 우월주의자의 범죄에 굴하지 않고 인종차별 종식을 위한 노력이 지속돼야 한다고 호소했다. 증오와 폭력에 대한 해법을 찾으려는 정치가의 역할을 넘어 인간의 한계를 고백하고 은혜의 필요성을 절실히 구하는 성직자의 풍모가 엿보였다고 할까. 언론매체들이 극찬한 대로, 추도 연설은 오바마의 천부적인 언어구사력, 공감 능력, 지성적 탐색 등이 돋보이고 게다가 찬송 부르기까지 곁들인 감동적인 본보기였다. 이를 통해 오바마는 국가 지도자의 임무가 무엇이고, 민주적 리더십이 어떤 내용을 지녀야 하는지를 웅변해주었다. 그것은 전지적(全智的) 관점에서 평가하고 하명하는 게 아니라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고 구성원들의 호의를 이끌어 내는 노력과 맞닿아 있을 듯하다. 그리스어 단어 카리스 또는 카리스마의 본래 뜻이 (신의) 은혜, 선한 의지, 긍휼, 자비 등이라니 어떤 지도자의 카리스마는 분명 그런 노력, 더 나아가 은혜의 관리자가 되는 과정 속에서 다져지는 것이리라.
돌이켜 보면, 추도 연설에는 해당 공동체가 높이 평가하는 가치를 집약하는 역사적인 명문장이 등장하곤 했다. 고대 아테네 민주정의 전성기를 이끌면서 “아테네의 정치 체제(폴리테이아)는 민주주의”이고 “아테네는 그리스의 학교”라고 강조한 페리클레스의 위풍당당한 선언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전사자들을 기리는 연설의 일부였으며, 민주주의 정부를 요약한 에이브러햄 링컨의 명문구,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역시 미국 내전 당시 북부의 전몰장병을 애도하는 게티즈버그 연설의 일부였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_경향DB
훗날 그런 명연설에 필적한다고 평가받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오바마의 이번 추도 연설은 인종문제와 정의라는 무겁고 복잡한 주제를 자신의 시대 인식, 링컨이나 마틴 루터 킹 같은 위인들의 미국에 대한 이상과 잘 엮어 역사의 흐름 속에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이 빛을 발한 사례였다. 오바마의 소개에 따르면, 장례식이 열린 찰스턴의 ‘마더 에마누엘’ 흑인 감리교회는 자유를 추구한 창립 교인들이 노예제 종식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완전히 타버렸다가 재건된 이력을 지녔고 킹 목사가 설교한 장소이기도 했다.
오바마는 어떻게 역사가 더 나은 세상으로 향하는 길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게 하는 설명서여야만” 하는지 역설하면서 역사와 대면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또 그는 이번 사건의 의미를 넓게 파악하고 오래 지속되는 편견과 불평등의 현실을 구체화하기 위해 노예제, 인종분리, 흑인 차별 등 역사의 프리즘을 적절하게 활용했다. 이런 노력과 여론의 분위기에 힘입어 결국 며칠 전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오랫동안 논란과 불화의 불씨가 된 남부연합기의 공공장소 게양 금지 법안이 최종 확정되었다.
사실 오바마 대통령뿐 아니라 미국의 여러 정치인들은 역사의 교훈과 유산을 검토하고 연설 속에 인용하거나 녹여내면서 자랑스럽거나 감추고 싶은 역사와 대면하고 그 가치를 되새기는 데 익숙해 보인다. 혹시 한국의 정치인들이 비역사적 풍토나 역사의 박제화를 딛고 이를테면 정조와 다산 정약용의 개혁 구상이나 독립투사들의 어록과 사상을 살펴보고 직접 인용하며 역사와 만나고 역사를 존중하는 전환을 보여줄 수 있다면, 한결 나은 정치적 경쟁의 소재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박구병 | 아주대 교수·서양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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