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스민 혁명 2년과 아랍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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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재스민 혁명 2년과 아랍 여성

by 경향글로벌칼럼 2013. 3. 10.

이희수 | 한양대 교수·중동학

 


재스민 혁명 2년. 아랍 민주화 항쟁의 중심지였던 북아프리카를 최근 다녀왔다. 두 가지 새로운 사실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튀니지 청년 무함마드 부아지지의 분신으로 촉발된 민주화 시위가 왜 대도시가 아닌 사하라 사막 언저리의 시디 부지디라는 작은 마을에서 촉발되었나 하는 의문에 명쾌한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독일 기갑부대의 명장 롬멜과 영국군 사령관 몽고메리가 맞붙은 사하라 대회전의 전장이었던 이 마을은 1950년대 프랑스에 대항해 튀니지 독립전쟁을 이끈 가장 치열한 항쟁의 성소였다. 시디 부지디는 튀니지의 자존심이자 정의로운 투쟁의 표상이었다. 벤 알리 독재정권의 불의와 부패에 과감히 맞서는 반정부 투쟁의 요람이 된 것은 어쩌면 역사적 소명이었다. 그 대가로 정치적 박해와 극심한 차별이 따랐고, 튀니지에서 유일하게 대학이 없는 주가 되었다.


젊은이들은 큰 도시로 떠났고, 마을의 주요 수입원인 인산광산은 부패 관료들과 결탁한 자본가들의 횡포로 4000명의 일자리가 2000개로 줄어들었다. 실업과 좌절은 부패를 만나면서 더욱 강한 분노를 잉태했고, 무함마드 부아지지라는 청년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아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헤자브를 두른 어머니 메노비아는 시청 앞에서 1인시위를 시작했다. 자유와 정의를 위한 한 여인의 절규는 시민들을 움직였고, 알 자지라 방송을 통해 아랍 전역의 아들들을 일깨웠다. 드디어 그들은 무차별 사격을 두려워하지 않고 행동했고, 세상을 바꾸고 새 시대를 열었다.


현장에서 확인한 또 다른 사실은 고뇌의 중심에는 여성들이 있다는 점이다. 아랍여성들은 시위의 선봉에서 가장 주도적으로 재스민 혁명을 이끌었지만, 그 후 집권한 이슬람 성향의 정부는 여성들을 주변부로 밀어내거나 정치적 참여에서 배제하는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이는 사회활동을 남성들의 역할로 규정하고 여성들에게는 집에서 양육과 가정경제를 맡도록 가르치는 이슬람 율법의 젠더 인식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엔나흐다를 지지하는 튀니지인들이 총선 승리를 자축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경향신문DB)


새로 집권한 이집트의 자유정의당은 ‘여성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이슬람식 율법 규정을 분명히 하면서 여성들의 정치적 권리를 옥죄고 있다. 모로코에서도 이전 정부에서는 8명이던 여성 장관이 이슬람 정당이 주도하는 현 정부에서는 단 1명으로 줄었다. 특히 모로코 의회는 여성의 결혼연령을 종래 18세에서 16세로 낮추는 법안을 여성단체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통과시켰다. 이집트에서도 최근 선거 결과를 보면 의회 의석 중 여성 의원의 숫자가 1% 미만으로, 무바라크 정권 시절의 12%에 비하면 거의 전멸한 상태다. 리비아 신정부도 여성들의 권익과 정치 참여를 보장하기 위해 당초 의회 의석의 10%를 여성에게 할당하는 법안을 준비했지만, 결국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상대적으로 여성들의 정치 참여가 자유로운 튀니지에서도 217석의 의회 의석 중 여성 의원이 49석을 차지했지만, 42명이 이슬람법 샤리아를 지지하는 이슬람 성향의 집권당 엔나흐다 출신이어서, 여성 활동가들의 입지가 심각하게 위축되었다. 나아가 많은 여성 운동가들은 엔나흐다가 몇 명의 여성 의원을 상징적으로 진출시켜 튀니지 전체 여성의 본질적인 권리와 차별을 정당화해주는 방패막으로 삼고 있다고 비난을 퍼붓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시위 도중 이집트 군경에 체포된 여성 운동가들이 조사 도중 강제로 처녀성 검사를 받은 사실도 폭로되면서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아랍 인구의 절반은 여성이다. 그들이 사회통합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면 재스민 혁명의 진정한 성공은 기대하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2011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예멘의 젊은 여성 활동가 타왁쿨 카르만의 절규는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아랍의 여성 문제는 남녀가 가진 열정과 기량이 똑같이 발현되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에서만 해결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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