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한·일관계, 출구전략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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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정동칼럼]한·일관계, 출구전략이 필요할 때다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4. 9.

“아시아 패러독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한·중·일 삼국이 경제적으로는 상호의존하면서 번영을 이루어내고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계속 갈등관계에 있는 역설적 상황을 지칭한다. 경제에서 협력하면 정치도 따라서 협력해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왜 안 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말이다. 올해가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이고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지 50년이 되는 해인데 아직도 과거사 문제로 갈등하고 있는 한·일관계가 아시아 패러독스의 전형적인 예로 거론된다. 두 국가 모두 자유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채택하여 잘사는 나라들인데 왜 아직까지 서로 역사문제로 싸우고 있는지 그야말로 역설적인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아시아 패러독스를 이와 같이 역설로 해석하지 않고 오히려 상당히 긍정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역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시장이 정치를 극복한 바람직한 예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정치적 갈등이 상존하지만 시장이 이러한 정치적 장벽을 넘어서 경제적 협력관계, 거래관계를 촘촘히 엮어나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 이유는 현재의 국제정치는 시장이 과거 정치의 영역을 상당부분 대체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전쟁을 통하여, 식민지 수탈을 통하여, 무력으로 원하는 것을 얻었던 시대였지만 지금은 총 한발 안 쏘고, 사람 한 명 안 죽이고 원하는 것을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시장에서 땅도 살 수 있고, 자원도 살 수 있으며 노동력과 기술력도 살 수 있다. 그래서 이제는 전쟁으로 영토와 나라가 통째로 없어지는 문제보다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통상활동을 통하여 개개인이 경제력을 쌓는 문제가 훨씬 더 중요해졌다. 군사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시장과 경제력의 시대인 것이다.

일례로 제국주의 시대의 종언을 고한 1945년 이후 주권국가의 수는 점점 늘어나기만 하여 당시 70개국이었던 것이 지금은 190개국을 넘어섰다. 허약한 주권국가도 많지만 소멸되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기만 한 것이다. 서방진영과의 냉전에서 진 구공산권 국가들 역시 서방진영에 병합되지 않고 꿋꿋이 잘 살아가고 있다. 경제위기로 나라가 망했다는 그리스도 경제적으로 허덕이지만 소멸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의 국제정치는 국가 운영을 잘못하면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무척 못 살게 되는 국제정치이다. 잘사는 국가에서 못 사는 국가로 순위만 바뀐다. 중국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설립할 때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포함한 미국의 동맹국들이 대거 참여한 것도 군사력보다 경제력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시아 평화와 역사교육연대’가 6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 회의실에서 일본 중학교 교과서 검정 결과에 대한 평가를 발표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광복 70주년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은 한·일관계로 다시 눈을 돌려보자. 지금 과거사 문제로 한·일관계가 최악이라는 말이 나온다. 일본정부의 과거사 해석은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해석이다. 제국주의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 싸움은 승자와 패자를 가리기 힘들다. 객관적 사실로 승패가 갈리는 것이 아니라 사관과 해석에 의해서 지난한 논쟁이 계속될 뿐이다. 일본 아베 정부의 역사인식은 단시일 내 소멸될 것도 아니고 정권이 바뀌어도 상당히 강력하게 남아있을 가능성이 커서, 한·일 간의 역사 싸움은 지금 상태대로라면 끝 모를 싸움으로 갈 것 같다. 그러나 역사 싸움과 달리 시장은 비정하여 잘못하면 바로 망하는 사람이 나오는 세계다. 도산하여 밥을 굶는 사람이 생기는 곳이 시장이다. 그래서 끝없는 역사 논쟁으로 인해 시장상황이 나빠지면 시장에서 바로 압박이 오고, 한·일관계를 개선하라는 시장의 요구가 강해진다. 명동의 상인들이 그러할 것이고, 한류산업이 그럴 것이고, 일본에서 부품을 들여오거나 일본에 납품하는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가뜩이나 경제사정이 나쁜 현재 상황에서 결국 정치의 영역을 다시 시장이 압도하여 들어올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정부차원에서 악화된 한·일관계의 출구전략을 생각해야 한다.

출구전략을 찾는다는 것은 역사문제를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논쟁이 지속될 역사문제는 전문가들과 외교실무자들에게 맡기고 한국과 일본의 정상은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동아시아가 안정적이고, 자유로운 번영의 시장으로 확대될 수 있도록 안보적 안정과 다자제도 등의 공공재를 제공해야 한다는 의미다. 혹시 오해가 있을지 몰라 강조하지만, 한·미·일 협력은 “안정과 제도라는 공공재”를 제공하여 동아시아 시장이 잘 돌아가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하고 여기에는 중국도 함께해야 한다. 역사가 모든 것을 정지시키면 결국 상인의 칼은 정치인을 향하는 시대다.


이근 |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싱크탱크 미래지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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