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위험하다. 뉴욕에 이어 파리가 끔찍한 테러의 현장이 되었다. 2015년의 끝자락과 2016년의 첫머리를 파리에서 보내고 며칠 전에 귀국했다. 유학 시절 7년, 자발적 망명 시절 10년을 보냈기에 제2의 고향이 되어버린 파리에서 대규모 테러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던 지난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사건 발생 직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프랑스가 전쟁 상태에 들어갔다며 긴급조치를 선포했다. 한국의 외무부는 파리를 여행하기에 위험한 지역으로 분류했다.
파리에 도착한 다음날 나는 밤과 낮이 뒤바뀐 시차에도 불구하고 파리 시내 답사에 나섰다. 영상 10도를 웃도는 푸근한 날씨였다. 파리는 20개의 구가 중심부에서 주변으로 달팽이 모양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12구에서부터 20구까지 9개의 구가 파리 교외와 인접해 있다.
20세기 초 그곳에는 타원형을 그리는 순환열차가 다녔지만 2차 대전 이후 순환버스로 대체되었다가 21세기에 들어서 순환전차가 등장했다. 현재 전체 노선의 3분의 2가 완성되었고 나머지 구간은 공사 중이다.
예전에 즐겨 찾던 15구의 브라상스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나서 전차를 탔다. 전차 안에는 아시아인, 흑인, 아랍인, 백인들이 골고루 섞여 있다. 과거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했던 제국의 수도 파리에 오면 언제나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이 인종적 다양성이다. 내가 탄 전차는 15구를 지나 14구로 들어선다. 유학생 시절 3년 동안 살았던 시테 위니베르시테르가 보였다. 사르트르도 학생시절 그곳에 살았다. 13구로 들어서니 아시아 사람들의 비율이 높아진다. 차이나타운이 있는 곳이다. 센 강을 건너 12구로 들어섰다. 포르트 드 뱅센에서 전차를 갈아탔다. 뱅센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1931년에 열렸던 식민지박람회 당시 지은 식민궁전이 보였다. 지금은 프랑스에 이민 온 사람들의 역사와 삶을 보여주는 이민박물관이 되었다.
전차는 12구를 지나 20구로 들어선다. 아랍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2015년 1월 초에 일어난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이 일어난 곳이 그곳에서 멀지 않다. 19구에 들어서니 새로 지은 파리 필하모니 연주홀이 보였다. 과거 ‘위험한 계급’으로 불렸던 노동자들이 모여 살던 파리 동북부는 20구와 19구를 지나 18구로 이어진다. 전차는 18구의 변두리인 라 샤펠에서 운행을 멈춘다. 그곳에 내리니까 흑인들의 비율이 높아진다. 교외로 나가는 시외버스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멀리 서울에서 듣던 바와는 달리 무슨 전쟁 상태는 아니었지만 약간의 불안감이 감도는 일상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다음날 오후에는 16구의 파시에서 트로카데로 광장을 거쳐 센 강을 건너 7구의 생제르맹 데 프레 구역으로 갔다. 가는 길에서 동유럽이나 중동에서 이민 온 것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앉아 행인들에게 구걸하는 모습을 보았다. 지하철 입구나 더운 공기가 나오는 환풍 장치 위에 담요를 깔고 누워있는 노숙자들도 보였다. 브랑리 강변에는 네 명이 한 조를 이룬 무장 군인들이 순찰하고 있었다. 오후 5시가 넘자 이내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고 가로수에 장식된 샴페인 잔 모양의 흰색 네온사인이 깜박거렸다. 잔 속에서는 샴페인 방울이 보글보글 올라오고 있었다. 바크 거리로 걸어 들어가 그르넬 거리와 만나는 사거리에서 기관총을 들고 순찰하고 있는 경찰의 시선과 마주쳤을 때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마음이 움찔했다.
거리의 상점 진열창에는 전통 양식의 침대보, 그릇, 가구 등 파리 중심부 사람들의 안락한 생활을 짐작하게 해주는 물건들이 미학적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6구의 뤽상부르 공원을 거쳐 5구의 라탱 구역으로 들어갔다. 소르본대학 앞 광장을 지나 에콜 거리로 나와 나의 단골 서점 콩파니 서점으로 갔다. 그곳에서 한참 동안 새로 나온 책들을 보다가 생쉴피스 광장까지 걸어가서 ‘카페 드 라 메리’에서 1664 맥주 한 잔 마시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과거와 달리 기가 죽은 분위기였다. 버스를 타려고 광장 앞으로 갔다. 그때 비둘기가 날고 성당의 종소리가 들렸다. 지난 1년 사이에 파리의 모든 버스 정거장의 디자인이 달라졌다. 95번 버스를 타고 몽파르나스 역 앞에 내려 지하철 6번선을 탔다. 그런데 파스퇴르 역에 도착하자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수상한 꾸러미’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 모든 승객은 다 내리라는 내용이었다. 하는 수 없이 몇 정거장을 걸어서 다시 지하철을 탔다.
테러 사건 이후 어수선한 상황에서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 휴가가 끝나고 바겐세일이 시작되었다. 생토노레 거리 등 파리의 상가에는 물건을 사기 위해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쇼핑백을 들고 다니는 중국인 관광객들과 자주 마주쳤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테러와 관련된 이중국적자들의 프랑스 국적을 박탈하겠다는 올랑드 대통령의 헌법 개정안을 두고 찬반 논의가 분분했다.
인권단체, 변호사협회, 노조 등은 긴급조치하에서 인권침해와 정보통제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 문제제기를 했다. 대통령과 총리가 샤를리 에브도 테러 1주년을 맞이해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현판 설치 예식을 거행했다. 장-클로드 기유보는 신간 <전쟁의 고통>에서 1945년 이후 전쟁이 없었던 70년이 지나고 이제 어떤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했다고 썼다. 전후(前後) 시대가 가고 전전(戰前)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1월1일 아침 프랑스 퀼튀르 방송에 나온 원로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은 고삐 풀린 금융자본주의와 모든 형태의 근본주의가 두 개의 공적(公敵)이라고 말했다. 서로 다른 종교, 문화,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전쟁과 폭력 사태를 피하고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면서 평등하고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 시대의 화두다.
정수복 | 사회학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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