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KBS에서 방영된 <쿠쉬나메>라는 다큐멘터리는 7세기 페르시아 왕자가 신라에 와서 상호협력을 도모하고 신라 공주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밝혀주었다. 이미 통일신라 시대부터 한반도와 아랍 사이에 긴밀한 인적 교류와 폭넓은 문화적 접촉이 있었다는 내용들도 속속 알려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여전히 고정관념과 편견이 강한 중동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그곳 국민들과의 소통과 관계를 재조망하는 공공외교의 꽃이 아닐까.
서구와 이슬람 세계는 적어도 1200년간 지배·피지배 관계를 거듭하면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아픈 기억과 역사적 트라우마를 키워왔다. 아랍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스페인을 지배하는 711년부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오스만제국의 빈 공격을 막아내는 1683년까지 거의 1000년간 서구사회는 ‘이슬람의 공포’라는 질곡 속에서 고통받았다. 서구에 이슬람포비아(이슬람 혐오증)가 그토록 강하게 남아 있는 역사적 이유다.
그러다가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을 기점으로 200여년간은 이슬람 세계 대부분이 서구의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됐다. 결정적으로 오스만 대제국이 독일·오스트리아와 함께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해체되면서 아랍은 22개 나라로 쪼개져 독립했고, 터키도 공화국으로 겨우 살아남았다.
설상가상으로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정권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 이후 오갈 데 없는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의 심장부로 데려다가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주도해 1948년 이스라엘을 건국해 주었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하나씩 쫓겨나 지금 500만명이 나라 없는 난민이 됐다. 이들은 고토 회복을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중동 분쟁의 핵심 배경이다. 그 결과 반미감정은 중동 전역에 확산됐고, 이에 대항해 미국은 ‘이슬람=테러리스트’ 담론으로 모든 반미·반이스라엘 세력들을 억눌렀으며 노골적인 이스라엘 편들기와 군사적 지원을 계속해 오고 있다. 이는 반미 극단주의자들을 배태했으며, 이들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자생적 테러분자들을 양산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일제 식민통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기나긴 고통과 분노의 악순환이다.
중동 순방길에 나선 로라 부시 여사가 22일 반미시위대와 맞닥뜨려 곤욕을 치렀다. (경향DB)
그런데 우리나라는 중동·아랍세계와 아무런 역사적 트라우마가 존재하지 않는다. 중동 진출과 중동외교의 최대 선물이다. 그런데 이를 활용하는 지혜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런 점에서 쿠쉬나메 발굴과 한국·중동의 오랜 역사적 상호관계는 중동 국민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공공외교의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다.
중동에서 공공외교의 중요성이 커진 또 다른 이유는 종래에는 한·미관계와 한·중동관계가 두 개의 별개 축으로 움직여왔다면, 앞으로는 북한 문제와 함께 통합적 구도 속에서 상호연계되는 현상이 더욱 뚜렷해질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차지하는 중동의 높은 비중 때문에 반미국가인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 같은 나라를 다루는 미국 방식과 건설·플랜트·에너지 같은 시장으로 접근하는 우리의 대중동 전략이 충돌하거나 불협화음을 자져올 수 있다. 이는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이나 북한 핵문제, 한·이란 경제관계의 특수성 같은 현안들이 연계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외교부 내에 중동에 관한 비중 확대와 더 많은 전문적 역량 강화가 시급해졌다.
미국의 대중동 정책에 수동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중동국가들의 친한적 특수관계와 우호적인 역사적 자산을 바탕으로, 우리가 팔레스타인 문제나 시리아 사태 등 누구도 해결하지 못하는 중동 현안의 평화 메이커로, 나아가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조정자로 우뚝 서는 진전된 외교전략을 기대한다. 이를 위해서는 중동과의 민간 교류를 활성화하고 상호소통이 강조되는 공공외교의 강화가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이것이 미국의 일방적인 압력으로부터 우리 국익을 지키는 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이희수 | 한양대 교수·중동학
'경향 국제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제칼럼]과거사 정리로 본 한국의 ‘국격’ (0) | 2013.05.27 |
---|---|
[기고]인도적 지원이 절실한 ‘아랍의 봄’ (0) | 2013.05.23 |
[사설]아베 내각의 대북 ‘돌출외교’가 주목되는 이유 (0) | 2013.05.20 |
[경향마당]일본, 세계 지도국 되려면 군국주의 망령 버려야 (0) | 2013.05.13 |
한·미 정상회담과 한·중 정상회담 (0) | 2013.05.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