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역사상 가장 추악한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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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특파원 칼럼]역사상 가장 추악한 협상

by 경향글로벌칼럼 2012. 2. 22.
유신모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는 심각한 현실 속에서 그나마 미국이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한 가지는 ‘핵무기는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핵무장을 해도 북한이 만성적인 식량부족 국가라는 점, 주민들은 배고픔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점은 여전하다. 미국이 북한 핵문제를 다루면서 이 같은 약점을 활용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식량 문제는 정치적 문제와 직접 연계시켜서는 안되는 인도주의적 사안이다. 물론 식량 문제를 먼저 정치화한 것은 북한 쪽일지도 모른다. 미국의 한 당국자는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1년 전 북한이 식량 문제를 처음 제기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미국과의 대화 채널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었거나 한·미 공조를 흐트러뜨리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 같다는 설명이었다. 
누가 먼저였든 식량제공 문제는 이제 정치적 거래의 대상이 돼버렸다. 미국은 영변의 우라늄농축시설 가동 중단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확인 등 ‘사전조치’에 북한이 합의해야 식량제공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북한은 식량제공을 미국의 ‘신뢰구축 조치’라고 부른다.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가 1일 임성남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만나기 위해 외교부 청사로 들어오고 있다. 그는 면담 후 “한·미 양국은 북한과 회담 재개와 관계 개선의 길이 열려 있다는 인식을 같이했다”며 “그 길이 서울을 통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고 말했다. (경향신문DB)


미국은 애초에 ‘쿨하게’ 줘버리든지, 거부했어야 하는 식량제공 문제를 갖고 질질 끌다가 정치적으로 말려들었다. 미국은 지금도 대북 식량지원이 정치와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확고한 거래의 조건이 됐다는 사실은 미국이 더 잘 안다. 

지난달 리언 패네타 미 국방장관은 텍사스 포트블리스에서 미군 병사와 가족들이 참가한 타운홀 미팅 도중 미국이 북한의 ‘사전조치’를 이끌어내기 위해 대북 식량지원을 협상 레버리지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미국은 옥수수 등 알곡이 15% 포함된 영양강화식품 24만t을 지원하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은 알곡의 비율을 50%까지 올리고 전체 양을 최소 30만t으로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글린 데이비스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는 최근 의회에서 대북 식량지원을 우려하는 의원들에게 “이 문제를 북한에 양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미국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킨다 해도 지원 성격까지 인도주의적 사안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24만t이 됐든, 30만t이 됐든 그것은 인도주의와는 무관한 정치적 기싸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론이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미국이 배고픈 북한 주민들을 위한 식량을 정치적 지렛대로 삼았다는 점은 두고두고 미국을 괴롭힐 것이다. 앞으로 미국이 아프리카의 가난한 국가를 그야말로 순수한 마음으로 지원한다고 해도 그 이면에 어떤 정치적 이유가 숨어 있지는 않은지 의심하는 눈길을 피하기 어렵다. 

미국과 북한은 23일 열릴 3번째 고위급 회담을 위해 지금 중국 베이징에 모였다. 미국은 지난해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직전 ‘사전조치’ 이행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북한이 지금도 여전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한다. 

이번 회담이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해도 미국은 최종 합의를 위해 조만간 북한과 식량지원 문제를 마무리하기 위한 협상을 또 해야 한다. 양측의 입장 차이는 기껏해야 옥수수 5만~6만t이어서 합의가 어려울 것도 없다. 하지만 미국이 배고픈 주민들을 위한 옥수수 5만t을 놓고 자국민을 먹일 능력도 없는 ‘실패한 국가’ 북한과 벌일 정치적 흥정은 미국 외교 역사상 가장 추악한 협상이 될 것이다. 베이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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