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북녘 땅을 밟아본 적이 없다. 남북화해 기조가 물씬하던 2000년대의 첫 10년을 정치부와 경제부에서 보냈지만 유독 북한과는 인연이 없었다. 급할 것은 없었다. 금강산은 맘대로 오갔고, 개성공단은 잘 돌아갔다. 개성관광도 시작됐다. 선배들에게 농담처럼 “묘향산이 열리면 그때 막내가 제일 먼저 취재해보고 싶다”는 말도 했다. 술자리에서는 북한을 다녀온 지인들이 가져온 들쭉술이 종종 나왔고, 전통시장에서는 북한산 버섯이나 나물이 흔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금강산 출입이 금지됐다. 그러더니 개성공단도 닫혔다. 햇볕은 사라졌고 북한은 다시 갈 수 없는 얼음왕국이 됐다. 북한도 남북 간 통신선을 끊으며 ‘강 대 강’으로 나오고 보니 남북대치는 현실이 됐다. 일각에서는 “이 판에 북진통일을 하자”는 과격한 얘기도 나온다. 좋다. 힘으로 밀어붙여서 물리칠 수 있는 적이라면 말이다. 문제는 한 방도 맞지 않고 이길 수 있는 게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골칫덩이의 근원을 없애는 데 한두 방쯤은 각오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한 방이 우리에겐 치명적이다.
당장 파주에는 LG디스플레이가 있다. 포탄 한 방만 이 사업장에 떨어지면 한국이 보유한 세계 최고의 OLED 기술은 산산조각이 난다. 어디 LG디스플레이뿐인가. 삼성전자 탕정사업장, SK하이닉스 청주공장, 포항 포스코, 울산 현대차와 석유화학단지, 거제 대우조선해양 등 우리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사업장은 수없이 많다. 전시 군수물자 공급처가 될 이곳을 북한이 그냥 넘어갈 리 없다. 이들 사업장에 떨어진 ‘한 방’은 한국 기업들을 영원히 세계무대에서 도태시켜 버릴 수 있다.
눈 깜빡하는 사이 기술경쟁력 우위가 뒤집히는 세계시장에서 한 방은 결정타가 되고도 남는다. 행여 한 방으로 끝나지 않고 한 달 이상 가는 장기전이 된다면 남한의 상황은 상상할 필요도 없다.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실험으로 남북관계가 얼어붙고 있다. 11일 경기도 파주 오두산 전망대를 찾은 관광객들이 북한을 바라보고 있다._경향DB
웃음을 짓는 자는 따로 있다. 수조원을 퍼붓고도 해결되지 않는 세계적인 불황에서 ‘세계 7대 경제대국’의 자폭은 세계인들에게는 축복이 된다. 자동차, 철강, 반도체, 석유화학의 공급과잉이 한번에 해결된다. 거기다 전쟁특수까지 생긴다면 단번에 이 지긋지긋한 불황에서 벗어날지도 모른다. 1929년 대공황이 딱 그랬다.
미국을 10년 대공황의 수렁에서 건져낸 것은 2차 세계대전이었다. 사브, 스카니아, 볼보, 이케아 등 북유럽 대표기업들도 떼돈을 벌었다. 서유럽과 동유럽이 초토화된 대가였다. 한반도는 이미 ‘이 한 몸’을 희생해 남 좋은 일을 시킨 적이 있다. 일본이다. 우리에게는 민족상잔인 6·25전쟁을 일본은 ‘신풍(神風)’이라 부른다. 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기아에 허덕이던 일본은 6·25전쟁 당시 군수물자 공급처로 변신했다. 일본이 자랑하는 도요타, 소니도 이때 덩치를 키웠다. 덤으로 자위대를 창설하면서 재무장하는 기회도 얻는다. 이쯤되면 통일대박이 아니라 전쟁대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힘으로 눌렀다 치자. 골칫거리는 영원히 해결될까. 중동을 보면 답이 나온다. 텅 빈 북한을 중국과 러시아가 내버려 둘 까닭이 없다. 독재자가 사라진 북한은 본격적으로 미·일·중·러, 4강의 각축장으로 변할 게 뻔하다. 2000년대 미국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이란, 리비아, 시리아 등을 북한과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천문학적인 돈과 막대한 인명을 희생한 끝에 미국은 독재자를 물리쳤지만 중동평화는 오지 않았다.
당뇨나 고혈압은 분명 위험한 질병이지만 평생을 두고 관리하면서 갈 수밖에 없다. 한번에 낫는 수술이나 즉효약이 없기 때문이다. ‘힘 대 힘’으로 싸우면 우리는 분명 이길 것이다. 또 이겨야 한다. 그러나 그 승리가 우리에게 보장해주는 것은 없다. 수술은 성공하지만, 환자는 죽는다. 보호자의 선택은 무엇인가.
박병률 |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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