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만 뜨면 지구촌 곳곳에서 테러가 일상화되고 있는 원인은 무엇일까. 어떻게 보면 테러는 정치적 현상이다. 그러나 테러를 단순히 정치적 현상으로만 파악하려 든다면, 테러의 원인을 분석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오늘날 테러의 원인은 서로 다른 양자의 대립적 입장에서 주장되고 있다. 이슬람 사회와 무슬림 전통을 유럽 문명과 비교해 열등하다고 전제하면서, 폭력적 테러와 모든 악의 근원은 이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서방의 입장이다.
반면에, 냉전 이후 반세기 동안 서구와 미국이 만들어 놓은 경제적 착취구조와 이중잣대, 종교적 가치와 자긍심에 대한 협오와 유린이 급진 테러조직들에게 명분과 이데올로기의 배경이 된 원인이라는 것이 중동의 입장이다.
사실 이슬람교도의 미국에 대한 증오는 9·11테러의 뿌리가 되었으나, 미국이 9·11을 ‘테러 확산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오히려 패권주의 확산을 위한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테러가 더욱 더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이다.
역사적으로도 테러조직은 9·11 직전까지만 해도 대중적 지지기반을 갖지 못했고, 그 영향력은 급격히 쇠퇴했다. 더구나 테러가 급진적 이슬람 단체의 일반적인 대응 형식도 아니었다.
그러나 9·11테러는 주적을 잃고 헤매던 테러조직들에 미국과 서방이라는 분명하고 확실한 공격 목표를 심어주게 된 계기가 됐다. 이제 알카에다를 넘어 이슬람국가(IS)는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살해로 인류 ‘공공의 적’이자 ‘괴물’이 되어 버렸다.
세계는 폭력적 극단주의 테러조직에 공분하고 이들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양 진영의 서로에 대한 불신과 증오는 평화를 불러올 가능성을 오히려 희박하게 하고, 이러한 정서적 대립은 가장 넘기 힘든 전선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반인륜적 테러나 ‘외로운 늑대’의 테러가 비켜갈 수 있을까. 우리의 실상은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미성숙함을 보여준다. 사회 저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역 갈등, 신분 격차, 경제적 불평등, 정치 양극화, 약자에 대한 차별과 무시, 일상에서의 ‘억압’과 ‘혐오’는 많고도 흔하다. 더구나 ‘혐오’는 인터넷 공간을 넘어 실생활에서도 점차 커지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테러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나와 다른 입장과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무시, 조롱과 위협이 궁극에는 나 자신을 향할 수도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폭력적 극단주의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생명을 보호하려는 노력은 결국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9·11테러가 발생한 지도 벌써 15년이 되었다. 당시 폐허가 되었던 세계무역센터 부지 ‘그라운드제로’에는 박물관과 추모연못으로 구성된 메모리얼파크가 들어섰다. 메모리얼파크 정문에는 ‘절대 잊지 말자’란 슬로건이 걸려 있다.
서로 다른 양자의 대립적 입장만 주장하고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테러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악의 고리를 어디에서 끊어야 할 것인가. 꿈을 실현하지 못한 좌절한 젊은이들이 전사가 되기 위해 국경을 서성거리고 있는 한, ‘부르키니’를 착용한 무슬림 여성들이 해변에서 쫓겨나는 사태, 상처받은 이민자 여성들의 응어리가 풀리지 않는 한, 증오와 보복의 악순환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9·11테러 15주기를 맞아 극단적인 대립과 증오가 불러일으키는 테러의 실상과 폭력의 참담한 결과를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나와 다른 생각, 다른 가치를 서로 존중하면서, 공존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지혜를 고대한다.
이만종 호원대 교수·한국테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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