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아베에 의한, 아베의 일본
본문 바로가기
경향 국제칼럼

[아침을 열며]아베에 의한, 아베의 일본

by 경향글로벌칼럼 2015. 8. 16.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처음 집권한 1차 내각(2006~2007년) 당시 ‘안전보장의 법적 기반 재구축에 관한 간담회’라는 조직이 구성된 적이 있었다. 국제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범위를 넓혀 ‘보통국가’로의 회귀를 모색하겠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참여한 학자와 전문가들의 논의를 거쳐 나온 의견을 수렴해 낸 보고서를 통해 이를 법률에 반영한다는 아베의 의도가 투영돼 있었다. 독자적 무력행사의 발을 묶어놓은 안보법안을 개정하겠다는 게 목표였다.

문제는 총리의 사적 자문기구인 이 조직이 법령이 규정하고 있는 심의회와는 다르다는 점이었다.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간담회 구성원은 총리의 뜻에 따르는 인물만을 모았다. 당연히 총리의 입맛에 맞는 의견을 제출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주변에서 나왔다. 14명으로 구성된 간담회에는 개헌론자, 외무성과 방위성, 자위대 출신 인사가 대거 포진했다. 모두 ‘친아베 인사’들이다. 헌법학자로서 유일하게 참여한 니시 오사무(西修) 고마자와대 명예교수는 현행 헌법하에서도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합법이라고 주장하는 인물이었다. 오죽하면 여당 내에서까지 조직 구성에 대해 비판이 잇따랐다. 엄격하게 다뤄야 할 헌법 해석 문제가 이들의 견해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헌법 9조에서 금지한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용인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냈다. 1차 아베 내각이 단 1년 만에 끝나면서 보고서 내용이 곧바로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2차 집권에 성공한 아베 정권은 지난해 7월 헌법 해석 변경을 통해 집단자위권 행사가 가능하다는 일본 정부의 견해를 마련했다. 이어 지난달에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필요한 법률 제·개정안을 중의원 본회의에서 강행 처리했다.

지난 2월에는 ‘21세기를 되돌아보고 21세기의 세계질서와 일본의 역할을 구상하기 위한 유식자(有識者) 간담회’란 긴 이름의 모임이 출범했다. 21세기 구상 간담회도 총리 사적 자문기구로, 16명의 참가자들은 모임 발족 이후 7차례의 회의를 열고 지난 6일 최종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2차 세계대전 이전과 전후 70년간 일본이 걸어온 길에 대한 평가를 언급했지만 담화의 핵심인 ‘사죄’는 언급하지 않았다. 담화에 과거 잘못에 대한 ‘진정한 사죄’를 포함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었지만 이 문제는 총리의 판단에 맡기기로 했다.


아베 내각의 지지율 추이_경향DB



그 결과 지난 14일 발표한 전후 70주년 담화는 아베 총리의 속내를 고스란히 담아 나오게 됐다. 과거사에 대한 사죄는 주어를 생략한 채 ‘과거형’을 통해 교묘하게 피해 갔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것은 자국의 고립을 해소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고, 러일전쟁으로 아시아·아프리카 국민들이 용기를 갖게 됐다는 뻔뻔한 주장까지 등장했다.

지금 일본은 ‘아베 총리’ 단 한 사람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사실상 ‘1인 천하’나 마찬가지다. 다음달 있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도 재선이 확실시된다. 그에 맞설 대항마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가 재선에 성공하면 의회 해산이 이뤄지지 않는 한 2018년까지 집권하게 된다. 2020년 도쿄올림픽 때까지 아베가 총리를 맡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정치·외교·경제 분야에서 보여준 비교적 강력한 리더십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베에게 ‘도전장’을 던질 경우, 자신의 정치생명까지도 위태로워질 수 있다며 몸을 사리는 자민당 내부 분위기와도 무관치 않다. 자민당 중진인 야마사키 다쿠(山崎拓) 전 부총재조차 자민당을 과거 군국주의시절 관제기구였던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에 빗대며 당이 거수기로 전락했다고 비판할 정도다.

지리멸렬한 야당은 힘을 잃은 지 오래다. ‘전쟁 반대’를 외치며 아베의 폭주에 맞서는 풀뿌리의 저항이 거세지고 있지만 아베는 요지부동이다. 정치세력화하지 못하는 한계 탓이다. 무엇보다도 동북아 재균형 정책을 위해 일본의 협력이 절실하게 필요한 미국의 지지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있다. 시시때때로 꺼내 드는 ‘중국위협론’은 미국의 동의와 지지를 얻어내는 데는 그만이다.

이런 일본을 바라보는 주변국의 시선은 우려스럽기만 하다. 최근 만난 한 일본인 지인조차 “고이즈미(준이치로 전 총리)가 야스쿠니를 참배하긴 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토로할 정도다. 일방으로 치닫고 있는 아베의 행보가 광복 70년 이래 최악인 한·일관계의 최대 책임이란 지적이 많다. 하지만 앞으로가 더 문제다. 아베의 최종 목표는 평화헌법 개정이다. 하지만 대일 외교는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아베 총리 한 사람의 인식에 한국 외교가 휘둘리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조홍민 국제부장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