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 총수 일가에 대한 국민 반응이 싸늘하다. 고질적인 한국 재벌가의 기형적 지배구조 문제는 차치하고, 그 반감 속에 감추어진 불편한 진실이 있다. 그것은 국민들 사이에 팽배한 언어에 대한 이중적 잣대이다. 만일 롯데그룹 총수 일가가 재미교포이고 우리말을 못해 영어로 언론플레이가 이루어졌다면 상황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우리말도 못하는 총수 일가를 둔 롯데가 과연 우리나라 기업 맞느냐며 지금처럼 국민들이 핏대를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물론 지금의 국민 반응에는 일본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이 작용했을 수는 있다. 그래도 그것이 주된 이유는 아닐 것이다. 필자는 그 나머지를 국민들 마음속에 깊이 도사린 영어에 대한 기이한 숭배적 태도에서 찾고 싶다. 그 단적인 예로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 의회에서 영어 연설을 했을 때 많은 국민과 언론이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으로서는 부적절한 처사”라며 질타하기는커녕 되레 영어 잘한다며 찬사를 보낸 것을 들 수 있다. 물론 영어가 곧 세계어로 통하는 세상이라 이런 세태를 크게 탓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국민의 영어에 대한 과도한 사랑만은 반드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아이가 받고 있는 영어 사교육_경향DB
그렇다면 정작 영어를 ‘절대 갑’으로 인식하던 미국인들의 태도는 어떠할까? 2000년대 들어 큰 변화가 생겼다. 그들이 외국어에 대한 중요성과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중·상류층에서 외국어를 구사하는 ‘이중언어 보모’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물론 과거에도 외국인 보모를 고용했지만 그 경우 철저히 영어만 쓰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의 통계를 보면 2000년대 들어 해외로부터 유입되는 보모의 수는 2008년까지 꾸준히 상승하다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한풀 꺾인다. 그러나 그것은 경제위기 때문에 그 수가 줄어들었을 뿐이지 외국어 붐이 사그라졌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이런 외국어 붐을 활용해 미국에서 자국 언어의 세 확장에 박차를 가하는 나라가 있다. 프랑스다. 경제위기로 예산이 삭감된 공립학교에서 점증하는 외국어 욕구를 충족시키기 어려워지자 그 틈새를 노리고 프랑스 정부가 공세를 펼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프랑스 외무부와 교육부, 그리고 의회가 합심해 불어의 확산을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프랑스 정부는 뉴욕의 공립학교에서 수업이 반은 불어로, 나머지 반은 영어로 이루어지는 ‘영·불어 이중언어 교육 프로그램’ 확대를 위해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있다. 그 외에도 교사들의 프랑스 연수 또는 불어 교과서 등을 제공함으로써 미국에서의 불어 세 확산의 선봉에 서 있다. 그 결과 뉴욕시 일원에서 영·불어 이중언어 교육과정을 채택한 공립학교는 2007년 3개교에서 2014년 현재 10개교로 늘어났으며, 이로써 스페인어와 중국어 다음의 순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런 학교가 인기가 많아서 적지 않은 부모들이 이사까지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한다. 프랑스 정부는 이러한 직접적 지원뿐만 아니라 재미 프랑스 기업과 부유층 학부모에게도 모금을 해 향후 5년간 뉴욕시에서만 280만달러를 모아 영·불어 교육 프로그램을 채택하는 학교들을 계속해서 늘려나갈 계획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상황이 어떤가? 다른 언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미국에서조차 외국어에 대한 인식이 현격히 달라지고 있는 상황, 즉 영어의 절대성이 흔들리고 있는 마당에 우리는 오로지 영어에만 목을 매다시피 하고 있다. 조금 과장하면 심지어 우리말과 글보다 영어를 더 우선시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을 정도다. 광복 70주년이다. 애국은 우리말 사랑에서부터 시작된다. 나아가, 영어를 습득하는 데에만 일로매진하지 말고, 오히려 프랑스처럼 우리말을 미국에 퍼뜨려 그들이 배우도록 과감하게 진격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솔직히 요즘 미국에선 한국어의 인기도 상승 중이다. 이런 마당에 ‘한국어의 세 확장’, 우리라고 못할쏘냐!
김광기 | 경북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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