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흰옷과 여성 참정권
본문 바로가기
경향 국제칼럼

[여적]흰옷과 여성 참정권

by 경향글로벌칼럼 2019. 2. 7.

1918, 1920. 앞의 숫자는 영국 여성이, 뒤의 숫자는 미국 여성이 참정권을 얻은 연도이다. 물론 거저 주어지지 않았다. 쟁취되었다. 20세기 초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서프러제트·Suffragette)들은 초기엔 평화적·합법적 캠페인에 주력했다. 그러나 번번이 배신만 당하자 ‘말이 아닌 행동’을 구호로 급진적 투쟁으로 전환한다. 1913년 에밀리 데이비슨은 경마대회에서 국왕의 경주마에 몸을 던진다. 그로부터 5년 후(1918년) 영국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부여된다. 서프러제트의 물결은 대서양을 건너고, 1920년 미국 여성들도 투표권을 갖게 된다.

 

서프러제트가 주로 입었던 흰옷은 이후 ‘서프러제트 화이트’로 불리며 여성 참정권의 상징이 됐다. 영미권 여성들은 주요 정치적 행사 때 흰옷을 입는 것으로 연대의 메시지를 발신한다. 미국에서 1984년 주요 정당의 첫 여성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제랄딘 페라로, 2016년 주요 정당 첫 여성 대통령 후보가 된 힐러리 클린턴 모두 후보직을 공식 수락하며 흰색 정장을 입었다. 역대 최연소 하원의원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도 최근 의회 개원식에서 흰옷 차림으로 선서했다. 그는 “앞서 길을 닦은 여성들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라고 트위터에 밝혔다.

 

여성 참정권을 존중하는 의미로 흰옷을 입은 미국 민주당 여성의원들이 5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여성들이 의회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하자 환호하고 있다. 워싱턴 _ 로이터연합뉴스

 

5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국정연설에서도 ‘서프러제트 화이트’가 눈길을 끌었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부터 초선의 오카시오-코르테스까지 민주당 여성 의원들이 일제히 흰옷을 입고 나타난 것이다. 모든 여성에 대한 연대를 표명하고, 성차별적 언행으로 악명높은 트럼프에 항의하는 뜻에서다. 연설 도중 이들은 대체로 냉랭했으나 트럼프가 미국 여성들의 성취에 대해 언급할 때는 기립박수를 하며 환호했다. 딘 필립스 하원의원 등 일부 남성 의원도 흰색 슈트나 리본으로 지지 의사를 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5일(현지시간) 워싱턴 연방의회에서 신년 국정연설을 하기에 앞서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오른쪽)과 인사하는 모습을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지켜보고 있다. 워싱턴 _ 로이터연합뉴스

 

흥미로운 것은 검은색 옷차림의 멜라니아·이방카 트럼프와 달리 트럼프의 차녀 티파니가 흰옷을 입은 점이다. 소셜미디어에서는 그의 의도를 두고 갑론을박이 오갔다. “티파니 트럼프가 아버지의 심장마비를 유발하는 것 아니냐”는 글이 트위터에 올라올 정도였다. 트럼프는 딸의 ‘서프러제트 화이트’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김민아 논설위원>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