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유신회의 공동대표이자 오사카 지사이며 차세대 유망주인 하시모토 도루(橋下徹)가 위안부 발언으로 오사카 시의회의 문책결의를 앞두고 있다. 그의 추락을 숨죽이고 지켜보는 아베 신조 총리의 심정은 복잡하다. 이번 사태로 유신회는 한달 만에 지지율이 10.8%에서 6.4%로 하락하였고, 7월 예정인 참의원 선거 비례대표구 예상의석수도 반토막 났다. 당장은 자민당이 유신회 추락의 반사이익을 보고 있어 단독 과반수 획득의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지만 유신회는 아베 총리의 역사인식과 가장 가까운 우익적 정치집단으로서 선거 이후 정치연합의 파트너로 꼽혀왔다.
하시모토 대표는 주일미군이 성범죄를 줄이기 위해 풍속업(매춘)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황당한 망언을 했지만 정작 중요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아베 총리와 완벽하게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위안부 제도 자체는 여성의 존엄과 인권을 유린하여 결코 용납될 수 없지만 일본뿐만 아니라 제2차 대전 당시 연합군, 독일군, 소련군, 심지어 베트남전 중 한국군에게도 존재하였으므로 일본만의 문제로 일본이 비난받아서는 부당하다는 것이다. 또 비난의 이유가 국가에 의한 강제동원이라면 증거가 없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보면 하시모토에게 쏟아지는 집중포화는 아베 총리를 비롯한 자민당 지도부가 함께 받아야 할 일이다.
(경향 DB)
아베노믹스로 성과를 보이면서 지지율 고공행진을 펼치고 있는 아베 총리는 참의원 선거후 헌법개정에 정조준하고 있다. 우선 개헌안 발의요건을 명시한 헌법 제96조를 개정해 개헌의 문턱을 낮추려 한다. 현행 중의원, 참의원 각각 3분의 2 찬성에서 과반수로 바꾸는 1단계 개헌으로 차후 평화헌법의 요체인 제9조 개정의 여건을 갖추는 꼼수이다. 일본이 헌법 제9조를 개정해 자위대가 아닌 국방군을 보유한다 해서 동북아 전략환경에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군사력 증강은 개헌보다는 경제에 달려 있다. 중국과의 군사경쟁에서 뒤처지는 이유는 경제력 격차 때문이다.
아베 총리의 개헌이 초래할 후폭풍은 그 뒤에 깔려있는 역사 수정주의로부터 나온다. 자민당과 유신회의 우익적 지도부는 1945년 패전으로 성립된 전후 질서를 바꾸려는 거대한 아젠다를 추구하고 있다. 미군이 승자의 정의(victor’s justice)로 써준 일본근대사와 평화헌법을 자신의 손으로 다시 쓰겠다는 것이다. 최근의 ‘침략’ 논쟁에서 보듯이 이들은 일본이 전쟁에 졌기 때문에 침략국의 멍에를 쓴 것이며 당시 제국주의 식민지 전쟁 시대에 일본만이 아시아에서의 전쟁에 책임을 지는 것은 부당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점령군의 역사관은 이른바 자학(自虐)사관으로서 젊은 세대가 이렇게 역사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애국심이 결여되어 있고 따라서 일본의 미래가 어둡다고 개탄한다.
일본 하라주쿠의 젊은이들 (경향DB)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고 애국심을 고양하는 일이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어느 국가든 영광의 역사를 부각해 가르치고 있지만 잘못된 과거를 역사로부터 사상하는 행위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과거의 죄에 대해 솔직해지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후세에 제대로 가르쳐야 건강한 애국심이 고취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베 정권은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이런 점에서 아베 정권에 의한 개헌은 위험하다. 이들에게 개헌은 단순히 국가운영체제 혹은 군사력을 향상시키는 방안이 아니라 반동적 민족주의를 담는 국가 정체성으로 전환을 시도하는 일환이어서, 하시모토 사태는 반복될 것이고 한국 등 주변국의 의심과 위협인식은 깊어져 지역질서가 요동칠 가능성이 있다.
이 모든 변화의 열쇠는 일본의 유권자들이 쥐고 있다. 유신회, 다함께당과 선거연합으로 대승하고 개헌의 길로 들어가려는 아베 총리의 정치전략은 하시모토 발언으로 다함께당이 유신회와의 선거협력을 거부하면서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다. 앞으로 두달, 유권자들이 하시모토 사태를 어떻게 읽는가에 따라 향후 일본이 어떤 헌법을 갖고 어떤 민족주의를 추구할 것인지가 좌우될 것이다.
손열 | 연세대 국제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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