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회심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지난 17일 왕이 외교부장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을 동시에 추진하자”는 제안을 내놓은 것이다. 이러한 제안은 2005년 9·19 공동성명 정신에 부합하고 필자를 포함한 일부 전문가들이 꾸준히 제기해온 접근법이다. 하지만 중국을 포함한 6자회담 참가국 정부가 비핵화-평화협정 협상을 동시에 진행하자고 공개적으로 제안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국은 왜 이 시점에 이러한 제안을 내놓은 것일까? 왜 거의 꺼져버린 대화의 불씨를 다시 살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일까? 중국은 북핵과 사드로 진퇴양난의 처지에 몰리고 있다. 이에 따라 비핵화-평화협정 동시 협상은 북핵과 사드로 대표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핵심적인 당사국들인 남북한과 미국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북한으로서는 고려할 수 있는 제안이겠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다. 북한은 ‘제재와 대화는 양립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여왔는데, 중국도 유엔 안보리 제재에 동의를 표하고 있어 선뜻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한·미동맹은 최근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은 제재 국면이 좀 수그러들고 한·미 군사훈련도 끝난 이후에 중국의 제안에 응답할 공산이 크다.
한·미 양국은 중국의 제안을 거부할 공산이 커 보인다. 우선 양국은 “비핵화에 진전이 있어야 평화협정 논의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또한 박근혜 정부는 대북 제재 ‘위주’에서 ‘올인’으로 더 강경해졌다. 미국도 제재 수위를 높이면서 아시아 재균형 전략에 박차를 가하려고 한다. 이를 놓고 볼 때 한·미동맹은 중국과 북한의 의도가 대북 제재와 군사 전략에 김을 빼고 초점을 흐리려는 것으로 간주하고 협상에 동의할 가능성이 있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왼쪽에서 두번째)과 왕이 중국 외교부장(오른쪽에서 두번째)이 11일(현지시간) 독일 뮌헨안보회의를 계기로 뮌헨 내 한 호텔에서 만나 한반도 정세에 대해 협의하고 있다._연합뉴스
하지만 중국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넘쳐난다. 우선 한·미동맹이 중국의 제안을 거부하면, ‘협상에는 관심이 없고 북핵을 이용하려고 한다’는 중국의 의구심은 더욱 증폭될 것이다. 한·미동맹과 중국 사이의 전략적 불신이 깊어지면, 우리가 직면할 외교적, 안보적, 경제적 리스크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반면 중국의 제안을 수용하면 바닥으로 향하고 있는 한·중관계가 반등할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제안은 북한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이중 지렛대를 내포하고 있다. 비핵화와 평화협정 협상을 동시에 진행하면 북한의 추가적인 핵실험이나 장거리 로켓 발사를 차단할 수 있는 유력한 길이 열리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완전한 비핵화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북핵 고도화는 차단할 수 있는 지렛대를 확보할 수 있다. 반면 한·미 양국이 중국의 제안을 수용했는데 북한이 거부하거나, 비핵화에는 관심이 없고 평화협정에만 집착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한·미동맹은 강력한 대북 압박과 제재에 중국의 동참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지렛대를 갖게 될 것이다.
비핵화-평화협정 동시 협상은 개성공단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전기가 끊긴 상황에서 장마철이 되면 배수 시설을 가동할 수 없기 때문에 개성공단은 물에 잠기게 된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살리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게 되거나 막대한 복구 비용을 치러야 한다. 그런데 개성공단 폐쇄는 북한의 핵과 로켓, 남한의 강경 대응에 맞물린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비핵화-평화협정 동시 협상은 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남북대화의 물꼬를 터줄 수 있는 기회를 내포하고 있다. 가령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과 평화협정을 위한 4자회담을 개시하면서 남측에서 개성공단에 전력을 보내고 관련 인력을 투입하는 방안을 강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시간은 그 누구의 편도 아니기 때문이다.
정욱식 | 평화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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