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전화가 걸려 온 건 지난 21일 아침이었다. 수화기를 들자 기계음성 안내가 흘러나왔다.
“순펑(順豊) 택배입니다. 박은경님 앞으로 보낸 택배를 배달하려 했으나 부재 중이셔서 안내드립니다. 안내원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시려면 0번을 눌러주십시오.”
중국 4대 택배인 순펑은 자주 이용하는 업체인 데다 최근 집을 많이 비웠던 걸 떠올리며 ‘0번’을 누른 것이 화근이었다. 안내원은 ‘프로’였다. 광다(光大)은행 톈진(天津)시 다강(大港)지점에서 신용카드가 발급돼 배송하려 한다기에 신청한 적 없다고 하자, 누군가 명의를 도용한 것 같으니 경찰에 신고해 더 큰 피해를 막아야 한다며 관할서에 연결해 주겠다고 했다. 연결음이 나온 후 전화를 받은 자칭 경찰은 더 프로다웠다. 다강 공안분국 행정대(行政隊) 소속이라고 밝힌 그는 1월22일자 발급 신청 기록이 있는데 “톈진에 온 적이 없느냐”고 다그쳤다. “한국에 있었다”고 하자 “출입국 내역을 알아봐야 하니 여권번호를 부르라”고 했다. 경찰인지 어떻게 믿느냐고 물었더니 114에 전화해 다강 공안분국 전화번호를 확인해보라고 했다. 022-6314-5825. 그에게 걸려온 전화번호는 한 자리만 달랐다. 그는 5825는 대표번호고 부서별로 번호가 다르다며 안심시켰다. 그때부터 순순히 속아 넘어갔다.
“당신 이름으로 개설된 계좌를 300여명이 피해를 본 보이스피싱 조직이 사용하고 있으며, 검거된 조직원이 당신이 계좌를 빌려주는 조건으로 돈을 받아갔다고 자백했다. 당신의 현금자산이 합법적인지 확인해야 하므로 길게는 18개월간 계좌가 동결된다.”
당장 내야 할 집세 걱정을 하고 있는데 그는 “당신이 비록 외국인이지만 중국에 거주하는 한 중화인민공화국 법률을 준수해야 한다”며 불안감을 고조시켰다. 집 주소까지 술술 불다 정신을 차린 건 은행카드번호 16자리를 말하라고 할 때였다. 그제야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국내 보이스피싱 금융사기 유형별 비중 추이_경향DB
전화를 끊고 나자 허술한 속임수가 하나씩 떠오르면서 자책감이 들었다. 어눌한 한국어 말투로 “고객님 많이 당황하셨어요”라고 묻는 보이스피싱만 생각했을 뿐 중국에서 중국어로 속을 줄은 몰랐다. 은행이나 경찰서라고 했으면 경계했을 텐데 친숙한 택배 안내를 가장해 의심없이 받았다. 보이스피싱 본거지에서 살면서 조심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잘못이다.
금전적 손해는 피했지만 개인정보가 빠져나갔다는 생각에 은행 비밀번호를 바꿨고, 택배는 관리사무소에 맡겨두게 하고 있다. 거리가 꽤 떨어진 관리실에 들러 무거운 상자를 들고 올 때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반성한다. 자책감이 참을 수 없이 커지면 “탕웨이조차 보이스피싱에 속을 정도인데 뭐”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뇐다. 탕웨이는 2014년 1월 상하이에서 영화를 촬영하다 받은 전화에 속아 21만위안(약 3711만원)의 피해를 봤다.
전화 사기범들은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 중국 구이저우(貴州)성 공안청은 지난 23일 단일건 피해액으로는 최대인 1억1700만위안(약 176억원) 규모의 보이스피싱 용의자들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농업은행 본점 법무부와 상하이 송장(松江) 공안분국을 사칭해 두윈시 경제개발구 임원 양(楊)모씨를 속였다. 상하이에서 발급받은 신용카드가 있고 국제적인 보이스피싱 조직과 연루돼 있다며 조사에 응하게 하는 수법으로 돈을 빼냈다. 택배 회사가 동원된 것만 제외하면 방법이 거의 같았다.
관련 뉴스를 보며 피해자의 부주의를 탓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양모씨가 CCTV 뉴스에서 “당황해 ‘어떡하지’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고 울먹이는 모습을 보니 남일 같지 않았다. 보이스피싱은 조심하면 유치한 수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경계하지 않으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는 고도의 사기가 될 수도 있다.
박은경 기자 베이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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