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은 천심인가. 아니면 우매한 민중의 선택인가.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보는 시각은 이처럼 엇갈린다. 왜 영국 서민들은 경기가 나빠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탈퇴라는 자해를 했을까.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21일 런던 다우닝가 총리 관저 앞에서 유럽연합 잔류에 투표할 것을 호소한 뒤 연단을 떠나고 있다. 런던 _ AFP연합뉴스
국민투표는 EU 잔류와 탈퇴를 물었지만 유권자들은 여기에 정부에 대한 각종 불만을 한꺼번에 쏟아부었다. 경기침체로 어려움에 처한, 세계화의 과실을 별로 따내지 못한 영국 북동부와 중부에서 탈퇴 표가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국 내 이민자, 특히 다른 EU 회원국 시민들은 기본적으로 동기 부여가 높아 영국 시민보다 취업률이 높고 복지 혜택보다 훨씬 더 많은 세금을 납부해 영국의 복지에 기여했다.
그러나 탈퇴파는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앗아가고 테러 위험을 부추긴다는 거짓말을 집요하게 반복했다. 국익보다 EU 탈퇴를 요구하는 보수당의 분열 봉합을 앞세운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국민투표를 약속한 것이 무모한 도박이었다. 캐머런이 너무 자만해 잔류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과신, 국민투표 카드를 쓴 게 큰 실책이었다. 세계화의 선봉에 섰고 세계화의 혜택을 많이 받은 나라가 영국이지만 이게 골고루 분배되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탈퇴파가 기득권을 누리는 기존 정치권 대 서민이라는 프레임을 탈퇴 운동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우려되는 것은 영국발 고립주의와 반세계화 움직임의 확산이다. 민족주의의 본고장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통합이라는 실험을 계속해 오면서 민족주의를 호리병에 밀봉했다고 생각했다. 2010년 발발한 그리스 경제위기 틈새로 이 호리병에 꽁꽁 가두었다고 여겼던 민족주의가 빠져나왔다. 프랑스의 EU 탈퇴와 반이민 정서를 앞세우는 마린 르펜의 민족전선이나 네덜란드와 스웨덴의 극우정당인 자유당과 민주당이 같은 강령으로 목소리를 드높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의 공약도 이와 유사하다.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세우고 미국을 우선하겠다는 신고립주의다. 우연히도 지난 24일(현지시간) 스코틀랜드 골프장 개장에 참석한 트럼프는 영국의 EU 탈퇴로 드러난 민심이 자신의 공약과 유사하다며 득의양양했다. 1979년 5월 마거릿 대처의 영국 총리 취임, 이듬해 로널드 레이건 미 공화당 대통령의 취임. 대처가 시작한 신자유주의 물결은 미국에도 그대로 전파돼 2008년 금융위기 전까지 자유세계를 휩쓸었다.
브렉시트로 미국에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확률이 높아졌다. 트럼프 지지자들과 브렉시트 지지자들은 묘하게도 겹친다. 세계화로 많은 것을 잃어버렸지만 기존 정치권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다. 브렉시트로 분열의 단초가 드러난 미국 중심의 서구 질서에 가장 필요한 것은 리더십이다. 하지만 미국 대선전에서 보이는 양극화된 사회. 프랑스도 내년 상반기에 대통령 선거, 하반기에는 독일 총선이 예정돼 있다. 이미 ‘선거 사이클’에 들어간 미국과 유럽에서 리더십을 기대하기는 점차 어려워진다. 고립주의 바람이 거세질수록 기존 정치권도 이들의 논리를 일부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영국의 EU 탈퇴협상은 순탄치 않을 것이다. 유럽통합에 매우 회의적인 전 런던시장 보리스 존슨 같은 인물이 영국의 새 총리로 취임할 가능성이 높다. 유럽통합을 이끌어온 독일과 프랑스는 영국발 후폭풍을 막기 위해 구심력을 발휘할 터이고, 영국의 요구에 강경 대응할 것이다. 앞으로 몇 년간 유럽발 리스크는 우리와 세계 경제를 종종 짓누를 것이다. 잠시 물밑으로 들어간 그리스 경제위기, 난민위기 등 복합적인 위기가 자주 상승작용을 일으켜 세계 경제를 강타할 것이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은 후 우리 사회에도 신자유주의가 금과옥조(金科玉條)가 되었다. 아직도 분배는 정치적 구호로 들린다. 영국의 국민투표는 분배를 등한히 한 정부에 보내는 엄중한 경고다.
안병억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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