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식의 유럽 리포트]“EU는 운 다했어도 유럽 통합은 ‘끝’ 아니다…민족국가 체제로 회귀 없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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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정동식의 유럽 리포트]“EU는 운 다했어도 유럽 통합은 ‘끝’ 아니다…민족국가 체제로 회귀 없을 것”

by 경향글로벌칼럼 2016. 6. 27.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얀 지엘론카 교수(유럽정치학)를 만난 것은 영국이 유럽연합(EU) 국민투표에서 탈퇴키로 확정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24일 오후(현지시간)였다. <유럽연합의 종말>이라는 책을 낸 그는 EU에는 비판적이지만 유럽 통합에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다. 그의 연구실이 있는 유럽연구센터 1층에서는 이미 예정돼 있었던 듯 교수와 학생들이 국민투표 이후라는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가 나온 직후 옥스퍼드대에서 만난 유럽 전문가 얀 지엘론카 교수는 “유럽연합(EU)에는 종말이 올 수도 있지만 유럽, 그리고 유럽의 통합은 끝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도 “안전벨트를 꽉 매야 한다”며 불확실성에 대비하라고 경고했다. 옥스퍼드 _ 정동식 통신원

그는 인터뷰를 하는 내내 불확실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강조하면서 이번 투표 결과가 가져올 미래에 많은 우려를 표했다. 그는 여전히 EU의 미래에 대해선 어둡게 보면서 세계적인 격변이 예상되니 한국도 안전벨트를 꽉 매라는 조언을 빼놓지 않았다. 어느 쪽을 지지했는지 묻지는 않았으나, 투표 결과에 많이 실망하고 있는 듯 보였다. 개인적으로 이런 결과를 예상했는지 궁금했다. 그의 대답은 시니컬했다. “누구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박빙이리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 베팅업체들은 투표 전날까지도 모두 높은 승률로 잔류에 돈을 걸었고, 금융시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놓친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수없이 틀려왔다. 학자들도 예상하지 못했고 정치인들도 예상하지 못했다. 나이젤 파라지(EU 탈퇴를 주장해온 극우파 영국독립당 대표)조차 투표 당일 밤에 자신들이 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캐머런(영국 총리)도 질 것이라 생각했다면 애초에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러시안룰렛과 같다. 국민투표를 시작하는 순간, 이미 원하는 것을 얻기는 불가능해졌던 것이다.”

 

- 탈퇴가 이긴 가장 큰 이유는.

 

한편으로는 EU가 근 몇 년간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한편으로는 영국 정부가 EU와 함께 불평등, 불안정성, 분열된 정체성의 느낌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요소는 선거운동이 전반적으로 매우 단순한 흑백논리로 전개됐다는 점이다. 극단적인 논쟁들이 무대를 점령했고, 이성적인 대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시간이 아닌 광기의 시간, 광기의 축제였다. 이런 정치적 데마고그(선동) 속에서 이성적인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 투표 결과에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영국 정치인들이 이런 국민투표를 하기로 결정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말이다. 국민투표는 승자독식에다, 협상의 여지가 없는 제로섬 게임이라는 문제가 있다. 캐머런은 (국민투표를 통해) 보수당을 통합하려 했으나 오히려 이전보다도 훨씬 분열됐고, 그 자신은 일자리를 잃었고, 나아가 영국은 스코틀랜드를 잃을 것이다.”

 

어느 쪽이 이겼든 투표는 이제 과거가 돼버렸다. 이번 투표가 중요했던 것은 세계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세계 5위 경제대국이 전례 없는 길을 가겠다고 기존의 판을 뒤엎었으니 그 불확실성에 세계는 두려워하고 있다.

 

- 당장 예상되는 부작용이나 우려는.

 

누구나 예상하듯 금융시장과 주식시장이 매우 불안정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정치적 불안감이 높아지고, 남 탓하기(blame game)가 만연할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영국과 유럽이 어떤 협상도 할 수 없다. 쉽지는 않겠지만 어떻게든 서로 진지하게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 이제 영국과 EU는 어떤 관계가 돼야 하나.

 

정치인뿐만 아니라 시장과 유권자들이 참여하는 매우 어려운 교섭이 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정치인들은 시장이나 유권자 둘 다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영국이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협상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다.”

 

- 영국이 EU 공동시장에는 참여하면서 자유로운 이동만 막는 것이 가능할까.

 

그보다 먼저 EU 내에서조차 자유 이동이 계속될지 지켜봐야 한다. EU 내에서도 (자유 이동을 규정한) 솅겐 조약을 철회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좋은 방안인지는 의심스럽다. 동유럽은 수출할 만한 자본이나 상품이 충분치 않은 대신 인적 자원을 갖고 있다. 동유럽국들이 이런 제안을 받아들일 리 없다. EU는 요새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제대로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 협상은 쉽지 않을 것이다.”

 

- 영국의 분열은 치유될까.

 

잔류와 탈퇴로 단순하게 나뉜 것은 아니다.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 잉글랜드와 웨일스 간의 분열이 있고, 런던과 다른 지역 간의 차이도 있다. 세계화와 금융위기 이후 살아남았다고 느끼는 사람과 졌다고 느끼는 사람 간의 간극이 있다. 이런 문제들은 영국이 EU에 남든 아니든 지속될 것이다. 이러한 분열은 투표로 변하지 않았다. 다만 더 복잡해지고 예측 불가능해졌을 뿐이다.”

 

지엘론카 교수는 저서에서 “EU는 운을 다한 듯하지만, 유럽 통합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지금의 EU는 유럽을 끌고갈 역량이 부족하고 구조적 모순 때문에 회생이 어렵지만 그렇다고 각국이 경쟁적으로 국력을 키웠던 폭력과 억압의 시대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으로 봤다.

 

- 다른 회원국들도 영국의 뒤를 따를까.

 

프랑스의 설문조사들을 보면 영국보다 유럽회의론자들이 훨씬 많다. 문제는 국민투표만이 아니라 영국이 협상 때 내놓은 예외조항들이다. 다른 나라들도 이것저것 원치 않는다고 표명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긴축이 싫다, 난민 쿼터를 받아들이기 싫다며 다들 원하는 것을 고집하면 협력은 없을 것이다. 국가를 바탕으로 한 국제적 통합은 이제 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도시와 지역, 시민단체, 기업 같은 행위자들도 함께하도록 해야 한다. 혁신이나 이민, 환경 문제의 해결을 생각한다면 주 행위자는 국가가 아닌 거대도시들이 돼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에게 주어진 자리가 없다. EU에는 작은 나라도, 망가진 나라도 있지만 런던, 파리, 함부르크 같은 도시들은 없다. 그래서 EU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 EU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이번에야말로 EU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다. 프랑스나 네덜란드가 비슷한 국민투표를 한다면 EU는 이 위기에서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 살아남는다면 EU는 극적으로 개혁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은 대안이 없다며 현상유지를 주장해왔으나 이제는 그런 입장을 고수할 수 없을 것 같다. -클로드 융커(EU 집행위원장)와 도날드 투스크(EU 정상회의 상임의장)는 이 사건이 미래에 주는 시사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들이 사임하지 않은 게 놀라울 정도다. EU가 환골탈태하지 않는다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 개혁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EU는 해체의 길로 가는 것인가.

 

“EU가 개혁에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그것이 유럽이나 유럽 통합의 끝을 뜻하지는 않는다. 유럽 국가들은 상당히 연결돼 있고 서로에게 어느 정도 의지한다. 유럽회의론자들이 말하는 대로 EU를 해체하고 국민국가 체제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본다. 다만 서로 함께 일하기 위한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할 것이다. 영국에서 일어난 일이 한국 경제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상호의존적인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의 국민국가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19세기로 돌아가는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한국인들도 국민국가 개념을 강하게 믿고 있겠지만 그런 사고는 한물갔다. 삶은 연결성(connectivity)과 이어져 있다. 벙커에 사는 것이 아니다.”

 

- 영국의 투표 결과가 EU 밖의 나라에는 어떤 영향을 끼칠까.

 

내가 줄 수 있는 조언은 안전벨트를 꽉 매라는 것뿐이다. 매우 혼란스러울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다. 예측은 불가능하다. 협상이 벌어질 것임은 알지만 어떤 협상이 원만히 진행될지, 어떤 협상이 어려울지는 예상할 수 없다. 법칙도, 선례도 없다. 한국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협동해야 하고, 시민들이 그 방식이 정당하다고 인정해야 한다. 둘째, 어떤 국제기구든 불평등과 불안정과 정체성 혼란을 가중시켜서는 안된다.”

    

 

옥스퍼드 | 정동식 통신원 (전 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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