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게 일하고, 많이 벌고, 오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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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목수정의 파리 통신

적게 일하고, 많이 벌고, 오래 살자

by 경향글로벌칼럼 2010. 2. 19.

목수정 작가·프랑스 거주

파리의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콜 데 보자르) 외벽에 설치됐던 작품 하나가, 설치된 지 몇 시간도 안돼 철거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문제의 작품은 과거 프랑스에서 수학한 바 있는 중국 작가 고시우란의 것으로 ‘적게 일하고, 많이 벌자’라는 내용의 글자를 검은 배너에 흰 글씨로 담고 있다. 누가 보아도, 2007년 사르코지가 대선에 출마하면서 사용한 슬로건 ‘많이 일하고, 많이 벌자’를 비튼 문구다. 그대로 걸려 있었다면 ‘그렇군, 재밌군’ 하고 넘어갔을 설치작품이 정치적 중립성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철거’되자, 이 나라의 어지간한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팔짝 뛸 만큼 부끄러운 학교 당국의 처사가 삽시간에 인터넷 공간을 타고 프랑스 전역에 번졌다. 하필 중국 작가가 그 작품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사람들의 흥미를 더 자극했다. 걸핏하면 중국의 희박한 인권의식과 정치적 후진성을 비난해온 것이 프랑스이기 때문이다.

사르코지의 ‘많이 일하고, 많이 벌자’ 슬로건은 ‘많이 일하고, 많이 벌고, 빨리 죽자?’와 같은 방식으로 비하되면서, 당시에도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갈수록 일자리는 줄어들고, 당연히 실업자는 늘어나며, 일터에 남은 사람들이 혹 월급을 좀 더 받을지언정, 그들이 과거에 알지 못했던 직장 스트레스로 자살을 하는 -민영화된 프랑스텔레콤에서는 지난 2년간 25명이 연쇄자살했다- 것이 사르코지 집권 이후 프랑스의 새롭고 슬픈 풍경이다. 사건은 문화부장관 프레데릭 미테랑이 전화를 걸어 작품을 원위치시킬 것을 학교에 명하고, 작가에게 직접 사과를 함으로써 마무리된다. 그리하여 다시 파리 보자르 건물 외벽에 걸리게 된 ‘적게 일하고, 많이 벌자’는, 대담한 설치미술에서 정치적 퍼포먼스로까지 그 영역을 넓히게 되었다.



심하게 알아서 기어주시는 분들 때문에, 언제나 일은 커지게 마련이다. 학교의 행동은, 두목 앞에서 슬슬 눈치 보며 점수 좀 따보려고 약한 주민들을 괴롭히는 똘마니의 품새 그대로다. 만만치 않은 배짱의 중국 작가가 학교를 대상으로 소송이라도 걸기 전, 어수룩한 품행으로 자주 구설수에 오르던 미테랑 장관이 그나마 최소한의 상식을 발휘하여 불을 껐기에, 국제적 망신을 간신히 모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이곳의 대체적 여론이다.

이 사건을 보면서, 한국 최장수 문화체육관광부장관으로 얼마 전 이름을 올리신 유인촌 장관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그가 단지 순천에 들른다는 이유로, 순천 기적의 도서관에서 슬그머니 사라졌던, 권양숙 기증도서 팻말 사건. 이는 유 장관과 심하게 알아서 기어주시는 기관장이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입각 이후 임기가 남은 문화부 산하 기관장들을 청소하는 일에 몰두했던 유 장관은 결국, 문화예술위원회 한 지붕 아래 두 위원장 같은 코믹한 뉴스거리를 만들어 냈다. 이 와중에 구경 난 예술위를 마냥 바라만 보고 있는 문화부. 파리 보자르 건물 앞에서 ‘철거된’ 설치미술처럼, 모르고 조용히 지나갈 수도 있었던 일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여주는 아둔한 정치의 열매라고나 할까. 자존심이나 원칙도 없이 낮은 포복과 아첨을 일삼는 자들이 번식한다는 것은 공포와 파시즘의 시대가 머지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런 자들이 벌이는 웃지 못할 코미디에 가능한 한 큰 소리로 껄껄 웃어주고, 공포를 명랑한 승리로 전환시키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한 때다. 똘똘하고 당당한 그 중국의 처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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