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규장각 도서를 둘러싼 불편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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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목수정의 파리 통신

외규장각 도서를 둘러싼 불편한 진실

by 경향글로벌칼럼 2010. 2. 5.

목수정 작가·프랑스 거주

외규장각 도서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문화연대가 제기한 도서반환 소송에 대해 프랑스 행정법원이 기각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문화연대는 즉각 항소를 결정하고 10만유로에 달하는 항소비용 마련을 위해 1만인 시민지원단을 모집하고 있다.
 


외규장각 도서 반환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한 지 20년 가까이 된다. 그때마다 우리는 약탈자, 제국주의자, 뻔뻔하고 오만한 프랑스를 신나게 욕해주기를 되풀이한다. 사람 사는 세상에는 법도 있고 도덕·상식 따위들의 룰이 있건만, 결국 가장 자주 우리 삶의 질서로 적용되는 것은 힘의 논리라는 사실을 매번 깨달으며 우린 긴 한숨을 내쉰다.

사람들은 종종 궁금해한다. 우리가 이렇게 분통 터뜨리고 있을 때, 프랑스 시민들은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불행하게도 프랑스에서는 외규장각 도서는커녕 병인년에 양국 사이에서 벌어진 작은 전투조차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이 문제에 어떤 여론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프랑스 박물관들을 가득 채우는 유물의 대부분은 제국주의 시절, 전 세계를 다니며 약탈해온 것들이니 그것을 돌려주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테고 예외를 만드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 쉽지 않은 일을 해결하는 길에는 두 가지 정도가 있다. 그중 하나는 정치적 결단에 의한 해결이고, 또 하나는 시민들이 격렬한 목소리를 함께 내는 것일 터이다.

한국 정부는 시민들이 성금을 걷어 프랑스 정부를 대상으로 소송을 진행하는 이 와중에 입도 벙긋하지 않고 있다. 재불 사학자 박병선씨가 처음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외규장각 도서 297권을 찾아내 주불 한국대사관에 알렸던 1978년, 한국 정부가 ‘뭐하러 이런 걸 찾아내서 귀찮게 하냐’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것을 생각하면 전혀 놀랍지 않다. 국민 사이에 외규장각 도서반환 운동이 벌어지며, 국민적 관심이 쏠리자 정부가 조금씩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또 얼마나 국민의 분노가 일어야 이 영혼 없는 자들의 둔한 민심감지기는 작동하는 걸까.

더 깊은 한숨의 이유는 다른 데 있다. 2007년 진행된 조사에 의하면 고문헌을 소장한 국립중앙도서관이나 서울대 규장각 등 41개의 학술기관, 대학이 보유하고 있는 226만여점의 고문서 가운데 한글로 해독이 된 것은 0.04%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반만년 역사를 지닌 ‘위대한 문화민족’의 수식어를 우리에게 명징하게 인식시켜줄, 선현 정신의 보고를 우린 그저 보관만 하고 있을 뿐이다. “16세기 영국의 위대한 작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21세기의 영국 어린이들도 쉽게 읽을 수 있지만, 19세기 조선의 위대한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저서는 21세기 한국의 지식인 대부분이 읽지 못한다.” 우리나라 고문서 번역을 책임지는 한국고전번역원장의 말이다. 누가 우리로 하여금 다산 정약용을 읽을 수 없게 만들었나.

프랑스의 오만을 꺾고, 그 책들이 우리 품에 귀환하기만을 바랄 뿐,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을 현재 우리 삶과 만나게 하는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한국사회의 불편한 진실은 외규장각 도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를 때마다 나를 더 깊이 한숨 쉬게 만든다. 고은 시인의 시를 읽은 적은 없지만 노벨 문학상 발표 때가 되면,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와야 할 의무라도 그에게 있는 듯, 그의 집 앞을 지키는 수많은 언론의 민망한 풍경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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