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외곽의 레이톤에 있는 폴란드 상점가 앞으로 20일(현지시간) 주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런던 _ 정동식 통신원
20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지하철 주빌리라인 동쪽 종점인 스트라트포드역 부근에서 만난 폴란드인 바라라 질린스카는 요즘 매우 심란하다고 했다. 그는 5년전 가족들과 영국으로 와서 열심히 일해, 가게 두 곳을 운영할 만큼 자리를 잡았다. 자신은 잡화상을, 딸은 바로 옆에서 식당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흘 앞으로 다가온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투표 때문에 걱정이 많다.
“우리는 여기서 부지런히 일하고 이웃들과도 잘 어울려 지내는데 왜 원망의 대상이 되는지 모르겠다. 제발 ‘잔류’가 되어 안심하고 계속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는 “브렉시트가 되면 우리 가족이 어떻게 될 지 불확실한데다 주고객인 폴란드인들이 줄어들 것이 분명해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불안감에 떠는 폴란드인들
한 정거장 떨어진 레이톤에는 꽤 큰 규모의 폴란드 공동체가 있다. 이곳에서 만난 이들은 ‘난민’과 자신들같은 이주자를 구분지으려 했다. 라파엘 코왈스키는 “난민이 문제라면 시리아에서 오는 사람들을 막아야지 왜 일하러 오는 유럽 사람들에게 국경을 닫으려 하느냐”면서 “이민자들이 영국 경제에 기여한 부분도 많은데 이제는 골치덩어리 취급을 한다”고 흥분했다.
이민자 문제는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가장 뜨거운 쟁점이다. 유럽연합(EU)의 규제 같은 이슈는 이성적 논쟁이 가능하지만 이민자 문제는 국민 정서와 직결돼 있어 찬반 진영 모두 표를 끌어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영국 국가통계청(ONS)에 따르면 2014년말 영국 시민권자 중 외국 출신은 인구의 8.3%인 약 530만명으로 추계됐다. 이 중 폴란드 출신이 약 85만명으로 2위인 인도(약 36만명)의 두배가 훨씬 넘었다. 최근 5년새 인도 출신은 10% 정도 증가했지만 폴란드 출신은 50% 이상 급증했다. 폴란드가 EU에 가입한 2004년 이후 11년만에 일어난 일이다. 외국인 시민권자가 곧 전체 이민자를 일컫는 건 아니지만 추세는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폴란드인들이 이민자 문제의 상징처럼 인식된다.
한 교민은 “그동안 영국인들의 경원 대상은 주로 파키스탄 사람들이었으나 그 타깃이 고스란히 폴란드인 쪽으로 옮겨간 느낌”이라고 말했다. EU 탈퇴를 주장하는 극우정당 영국독립당(UKIP) 대표가 ‘무슬림 테러범’을 연상케 하는 선전을 하고 있으나 실상 영국 내 이주민들의 대부분은 동유럽, 영국과 인접한 아일랜드, 과거 영국이 점령통치한 인도·파키스탄 출신들이다.
■이민자들 덕에 병원 대기시간이 줄었다
폴란드인들이 영국에서 주로 하는 일은 건설, 세차, 식당·가게 점원, 배관공 같은 직종이다. 폴란드인들은 저임금에 성실하고 학력까지 높아 영국 사회에 빨리 정착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의 서비스산업 문화를 바꿔놨다. 일례로 영국인이 운영하는 세차장은 운전자가 스스로 기계를 사용해 세차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는데 폴란드인들은 손세차로 바꾸었다. 한꺼번에 서너명이 붙어 실내까지 순식간에 세차를 해 주고도 요금은 매우 싸다. 교민들은 “살인적인 물가로 유명한 런던에서 유일하게 한국보다 싼 서비스 요금은 세차뿐일 것”이라고 전했다.
폴란드 출신 이주민들이 많이 사는 런던 외곽 레이톤의 한 주택 창문에 23일 치러질 국민투표에서 ‘잔류에 투표하자’는 글이 붙어 있다. 런던 _ 정동식 통신원
변기나 배수구가 막히면 이전에는 몇주씩 기다려야 했으나 폴란드 배관공들은 밤중에도 달려와 해결해준다. 미니캡으로 불리는 콜택시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운전사들이 트렁크를 열어주는 게 고작이었고, 팁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기 일쑤였다. 폴란드 운전사들은 손님들의 가방을 받아 실어주고 요금도 미리 알려준 뒤 정액으로만 받는다. 영국인 보모들은 맡고 있는 아이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일이 잦지만, 고학력자인 폴란드 보모들은 청소와 설거지는 물론 아이들 숙제까지 도와줘 영국의 장관들도 폴란드 보모를 쓸만큼 인기가 높았다.
서비스 시간을 단축시킨 또다른 예는 의료분야다. 영국에서 의사를 방문하려면 보통 2주는 기다려야 했다. 진료도 아침 늦게 시작해 오후 4시면 마쳤다. 폴란드 의사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아침과 늦은 오후는 물론 토요일에도 진료를 해 대기 시간이 현격히 줄었다. 캐머런 정부는 이를 대표적인 치적으로 꼽고 있다.
■영국인들은 “세금 빼앗아간다”
폴란드인들의 이런 방식은 소비자들과 고용주들에겐 환영을 받았지만 영국의 저소득 노동자들과는 마찰을 빚을 수 밖에 없었다. 일자리를 나눠갖는 제로섬 게임이 됐기 때문이다. 사회보장 비용도 불만을 거들었다. EU 국민은 영국에서 석달만 일하면 영국인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 따라서 이들이 일정 수준의 임금을 받지 못할 경우 자녀보조금과 노동보조금, 집세 보조금 등도 받는데 많을 경우 가구당 월 3500파운드(약 600만원)에 달한다. 영국인들은 폴란드인들이 일자리도 빼앗고 세금까지 가져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들 덕에 소비가 늘고 주택경기가 살아나 영국 경제가 다시 일어서는 원동력이 됐는데 지금은 부정적인 면만 부각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폴란드인들이 대거 들어온 뒤 반발이 일자 영국 정부는 루마니아·불가리아가 2007년 EU에 가입한 뒤 영국에 들어올 수 있는 시한을 억지로 늦췄다. 두 나라 사람들의 영국 내 취업을 7년간 제한했다가 2014년 1월에야 풀어줬다. 하지만 루마니아인은 2년여만에 영국 내 5위의 이민자 공동체로 떠올랐다.
반이민 정서에 기름을 부은 것은 터키다. 터키는 오래 전부터 EU 가입을 원해 왔지만 이슬람국가인 까닭에 반감을 가진 회원국들이 많다. 최근 시리아 난민사태로 EU가 터키의 도움을 받으면서 터키가 EU에 가입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다. 터키가 회원국이 되면 폴란드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영국으로 들어올 것이고, 이질적인 종교와 문화로 인해 더 많은 갈등이 야기될 것이라는 우려가 퍼졌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20일 “30년 내에 터키가 EU에 가입할 것으로 보는 전문가는 한 명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한 것도 이런 정서를 의식한 것이다.
런던 | 정동식 통신원·전 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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