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은 자신과 모두를 위한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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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목수정의 파리 통신

파업은 자신과 모두를 위한 싸움

by 경향글로벌칼럼 2009. 12. 12.

목수정 작가·프랑스 거주


세상의 모든 파업은 자신을 위한 싸움인 동시에 일하는 사람 모두를 위한 싸움이다. 나 자신의 밥그릇을 위한 싸움은 결국 모두의 밥그릇과 건강한 영혼을 위한 싸움이기도 한 것이다.

성탄절을 앞두고, 파티에 가는 여인처럼, 온 도시가 매혹적인 치장 속에서, 축제전야의 흥분을 나누는 파리에서, 관광객들로 붐벼야 할 국립박물관들은 현재 파업 중이다. 

2주전, 가장 먼저 파업을 시작한 퐁피두센터에 이어 루브르박물관, 오르세미술관 등 70여 개의 박물관, 국립극장들이 연이어 파업 대열에 나서고 있다. 정부가 문화부문 공기관의 고용을 대폭 축소하고, 문화기관에 대한 정부 지원을 줄이며, 점진적으로 국가에 속해 있던 문화 기관들을 지자체에 이양하려 하기 때문이다.

세계 1위의 관광국 프랑스에서, 문 닫힌 루브르 박물관에 실망할 관광객들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드높을 만도 한데, 이 파업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우호적이다.
“우리의 파업은 관람객들을 보다 나은 환경에서 맞이하기 위한 것”이기에, 닫힌 문 앞에서 즉각적으로 터져 나오는 실망의 목소리가 없진 않으나, 파업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압도적이라고 노조 측은 전한다.

물론, 파업에 참여하는 박물관 직원들은 최선을 다해 그들의 입장을 알린다. 불어,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에 이어 에스페란토로 적힌 전단을 만들어, 닫힌 박물관 앞에서 파업의 이유를 설명하며 시민들과 대화한다. 때로는 입장권을 판매하지 않고, 관람객들을 박물관에 입장시키기도 한다. 파업 중일 지라도, 박물관을 관람할 수 있었던 관객들은 그들의 파업에 더 큰 지지와 이해를 보낸다.



철도노조 파업으로 운행을 멈춘 KTX 열차가 차량기지에 서 있다. / 우철훈 기자



프랑스 국립박물관들의 파업은 물론 초유의 사태는 아니다. 2001년, 루브르 박물관은 무려 23일간 파업을 하여, 비정규직을 확대하려던 당국의 의도를 좌절시켰고, 2006년에도 국립박물관들은 파업을 통해, 축소되었던 고용을 되찾았던 바 있다.

이번 파업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은 “공공서비스로서의 문화의 미래 자체가 현정부에 의해 심각하게 위협당하고 있다”고 전한다.
1959년, 앙드레 말로를 수장으로 한 문화부가 설립된 이래, 프랑스 문화부는 공공서비스로서의 문화, 문화의 민주화를 최대 목표로 삼아왔다. 가능한 모든 것을 상행위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맹렬 신자유주의 집단 사르코지정부는, 반세기 동안, 좌우정부를 거치면서도 꿋꿋하게 지켜 온 공공서비스로서의 문화를 파괴하는데 문화부의 목표를 두고 있는 듯하다.

정부가 박물관 직원 수를 줄이고, 재정지원을 축소하면, 박물관들은 입장료를 올릴 것이고, 전시품들의 규모와 질적 수준은 저하될 수 밖에 없다.
재정자립도를 높여야 하는 박물관들은, 전시의 초점을 오로지 상업적인 목표에 맞추게 되면서, 박물관에서마저, 문화는 사라지고, 문화를 팔아 누군가의 주머니를 채우는 상행위만이 앙상하게 남는다. 관람객들은 전보다 형편없는 전시를 더 오랜 시간 줄을 서고, 비싼 돈을 지불하며 관람해야 한다.
결국, 문화부는 재정 지출을 당장 감소시킬 수 있겠지만, 그 대가는 모든 사람이 비싸게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이 예견된 불행을 막기 위해, 박물관 직원들은, 그들이 선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행동인 파업을 신성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파리에 왔던 첫 해이던 1999년 봄, 파리지하철 파업을 처음 겪었다. 어떤 예고도 없이, 어느 날 아침, 지하철역 입구의 철창은 내려져 있었다. 버스들도 멈춰 섰다.
내려진 철창을 발견한 사람들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서서 각자의 일터를 향해 걸었다. 어떤 이들은 오토바이를 끌고 나오고, 또 어떤 이들은 자전거, 인라인 스케이트 등을 들고 나왔다. 분노도 논란도 없었다. 마치 온 도시가 도보여행자들로 가득 채워진 것 같은 또 다른 축제의 광경이 연출되었다.
일터가 너무 먼 사람들은? 안 간다. 그렇게 해서 세상이 그들에게 선사하는 어쩔 수 없는(?)는 휴식과 정지를 받아들인다.

파리지엥들이 지하철 파업을 맞이하는 모습은, 비가 오니 비를 맞는 것과 같았다. 비가 오면 비를 맞을 뿐, 아무도 하늘을 향해 항의하지 않는다. 노동자가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온 세상이 인정하는 권리인 파업은, 노동자와 사용자가 있는 세상이라면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상의 풍경일 뿐인 것이다.

세계인이 가장 가보고 싶어하는 이 도시의 오늘은 예술을 사랑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권리를 지킬 줄 알고, 각자의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한 행위를 관용할 줄 아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 졌다. 프랑스의 한 네티즌이 썼던 대로, 닫힌 박물관에 실망한 관광객들은 거기서 대신 프랑스 노동자들의 지치지 않는 사회의식과 투쟁정신을 볼 것이다.
어차피 문화는 멀리 내다보지 않고 눈앞의 이익만을 바라볼 땐, 늘 밑지는 장사가 될 뿐이다. 파업도 그러하다. 100미터 앞도 보지 못하고, 코 앞의 현상만을 확대하여 비추는 언론, 그 얄팍한 언론들이 보여주는 것만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세상에서, 파업은 무한 질주를 방해하는 길가에 튕겨져 나온 모난 돌 일 뿐이다.
그러나 모난 돌들이 길가에 튀어나오면, 간혹 그 돌 뿌리에 누군가 걸려 넘어지더라도, 우린 그 돌을 원망만 하지 말고, 잠시 멈춰 서서 우리의 오랜 질주본능에 딴지를 거는 “모난 돌”들의 항변에 함께 귀 기울여야 한다.

얼마 전, 한국의 철도파업이 정부와 우파언론들이 그들에게 옭아맨, “불법”과 “폭력”이란 억지로 좌초하였다. 철도의 공공성을 파괴하고, 이를 민영화하여 시민들의 주머니를 갈취하고자 하는 이명박 정부의 명백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멈춰선 열차로 인해 면접시험을 보지 못한 수험생들의 사례 등만을 부각시킨, 보수언론의 치졸한 보도행태는 어김없이 반복되었고, 노조는 우리 사회의 무한질주를 방해하는 악마처럼 취급되었다.

기꺼이 모난 돌이 되어 우리가 가야 할 바른 길을 환기시키고자 했던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우린 대체 어디로 달려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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