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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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이범준의 도쿄 레터

개인의 죽음

by 경향글로벌칼럼 2020. 5. 13.

일본정부가 긴급사태선언을 발령한 지난달 8일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 도쿄대학 모습. 이 대학은 이날부터 도서관, 강의실, 연구실 등 대부분 시설을 폐쇄했다. 가운데 붉은색 건물이 야스다강당이고, 양옆이 법학부 건물들이다. 도쿄=이범준 사법전문기자


도쿄대학 정문에 들어서면 1969년 전공투가 점거했다는 야스다 강당이 보이고 양옆으로 법학부 건물이 늘어서 있다. 이곳에서 헌법학자 미노베 다쓰키치, 정치사상가 마루야마 마사오,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가 배우고 가르쳤다. 그런데 내가 입학해서 배운 것은 이러한 법학부 역사가 아니라, 재난에 대비하는 방법이었다. 학습실 내 책상 서랍을 여니 헬멧이 들어 있었다. 전공투가 쓰던 것과 같은 모양인데 본래 지진 대비용이라고 한다. 교내 위험물 분포를 익혔고, 대피장소와 이동경로를 외웠다. 자전거보험 안내서를 받았고 공대생은 실험자보험에 가입했다. 이 나라가 개인의 목숨을 소중히 여긴다고 느꼈다. 코로나19 사태를 맞기 전까지는 그랬다. 


아베 신조 총리는 “PCR 검사를 늘리려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말만 저렇게 하지 의지는 없다”고 사람들은 의심한다. 긴급사태를 연장한 5월4일(월) 발표만 봐도 ‘534건 검사에 200건 양성(공항 제외)’이다. 주말에는 검사 건수가 적다는 게 긴급사태를 선언한 정부의 설명이다. 지난주 일요일 발표한 검사 수도 1435명이다. 당초 아베 정부는 “코로나19 검사를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만 해야 한다”고 했다. 의료붕괴를 막는다는 게 그 이유다. 이러는 사이 집에서 죽고 길에서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죽는다고 사정해도 검사를 안 해주고, 너무 늦게 검사받고 죽기도 했다. 그런데도 병상이 남아 있다고 홍보했다. 병상이 있으니 의료붕괴가 아니라고 했다. 


도쿄 거리에는 사람이 무서울 만큼 없다. 지난달 긴급사태를 선언하며 아베 총리는 “사람과 사람 접촉이 80% 줄면 코로나 사태는 끝난다”고 했다. 강제력도 없어 불가능한 목표라고들 했다. 지난주 지하철 승객 수, 휴대폰 사용량을 보니 유동인구가 80%가량 줄었다. 사람과 사람 접촉은 99% 가까이 줄어든 셈이라고 했다. 한 사람이 출퇴근길, 회사, 식당에서 부딪히는 사람을 100명으로만 잡아도 그렇다고 했다. 스타벅스를 비롯한 외국계 체인점부터 동네 식당에 떡집까지 무기한으로 문을 닫았다. 그런데도 감염자는 크게 줄지 않았다. “검사는 안 하고 외출만 통제하니, 가정 내 감염이 시작된 것”이라고 전문가들이 말했다. 미국과 유럽 언론이 아베 정부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아베 총리는 “검사를 일부러 안 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화를 냈다. 과학분야 노벨상만 26차례 받은 일본을 ‘의료 후진국’이라 주장하는 것 같았다.


1947년 시행 현행 일본국헌법 13조는 ‘모든 국민은 개인으로서 존중받는다’고 선언하고 있다. 1890년 시행 메이지헌법에서 ‘천황의 신민’이던 이들은 맥아더가 만든 헌법에서야 개인이 됐다(respected as individuals). 주권의 주체는 국민이지만, 인권의 주체는 개인이다. 13조가 둘째 문장에서 정한 첫째 인권이 생명이다. 그런 아베 총리가 지난 5월3일 헌법제정일을 맞아 다시 개헌을 주장했다. 의회를 거치지 않는 긴급명령권이 있어야 코로나19와 같은 사태를 잡는다고 했다. 지난 시절 조선, 일본, 세계를 불구덩이로 몰아넣은 것이 메이지헌법 국가긴급권이다. 지금 아베 총리가 해야 할 일은 헌법 개정이 아니라 헌법 준수이고, 지켜야 할 것은 수치가 아니라 생명이다.


<이범준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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