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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나 경쟁자와 불가피하게 손을 잡아야 할 때가 있다. 어제는 적이었지만 오늘은 친구로 지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원한 친구는 아니고 언제든 다시 적이 될 수 있다. 소위 ‘프레너미(Frenemy)’이다. 친구라는 뜻의 ‘프렌드(Friend)’와 적을 의미하는 ‘에너미(Enemy)’를 합쳐 만든 말이다. 철천지원수인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한배에 타서 풍랑을 만난 오월동주(吳越同舟) 상황, 한 남성을 차지하기 위해 격렬하게 다투다가 어느새 함께 웃고 수다를 떠는 여성, 대기업에 맞서기 위해 경쟁 관계인 중소기업끼리 구축한 연합 전선 등을 설명할 때 사용된다.

 

전 세계를 상대로 패권 경쟁을 벌이면서도 필요에 따라서는 보조를 맞추는 미국과 중국도 대표적인 프레너미 관계이다. 2012년 2월 당시 중국 국가부주석인 시진핑이 미국을 방문하자 미 언론은 “프레너미가 왔다”고 표현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씨의 관계를 ‘프레너미’로 분석하기도 한다. 박 대통령과 최씨는 40년 지기지만 국정농단 사건의 죗값을 덜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책임을 떠넘겨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원수지간이 됐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뒤편 왼쪽에서 두번째)가 선거본부장을 맡았던 켈리언 콘웨이(뒤편 왼쪽) 등과 함께 22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 본사를 방문해 경영진과 칼럼니스트, 기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뉴욕 _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엊그제 뉴욕타임스를 방문해 이 신문을 ‘세계의 보석’이라고 극찬했다. 함께 만난 20여명의 기자에게는 “내가 잘못하면 언제든 전화해 달라. 기쁘게 들을 것”이라고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대선 동안 힐러리 클린턴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반면 트럼프에 대해서는 여성 편력과 세금 탈루 의혹 등을 거론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트럼프도 대선 기간 뉴욕타임스를 망해가는 신문사라고 부르는 등 적대감을 표출했다. 미국 정가에서는 트럼프가 뉴욕타임스를 프레너미로 삼으려 한다며 우호적인 평가가 나오고 있다. 위정자라면 언론의 선의 있는 비판은 수용해야 한다. 민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프레너미와 어감이 다르지만 한국에서는 정치인 등 취재원과 언론의 이상적인 관계를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너무 가까워 유착이 생겨도 안되고, 너무 떨어져 소통이 불가능해도 안된다는 의미다.

 

오창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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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 결과는 뜻밖이었다. 하지만 국내의 반응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마치 페이스북을 통해 조작된 뉴스를 보고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했다는 미국인들처럼, 특히 일부 진보 인사들은 잘못된 사실관계를 기반으로 해 엉뚱한 방향으로 감정이입을 하고 있다. 하나씩 짚어보자.

‘트럼프는 미국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틀렸다. 현지시간으로 11월17일 현재, 힐러리 클린턴의 총득표는 6282만5754표, 반면 트럼프는 6148만6735표에 그치고 있다. 약 130만표 차가 나는 것이다. 게다가 아직 500만표가량 개표되지 않은 표가 남아있다. 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다. 다시 말해 미국 국민들은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당선된 것은 미국이 연방국가이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은 국민들의 대표이기도 하지만 50개의 주로 이루어진 연방국가의 대표자이기도 하다. 트럼프의 당선은 민주주의적 원칙보다 연방주의적 원칙이 우선시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선이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성조기를 배경으로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다. ㅣAP연합뉴스

 

‘트럼프 지지층은 분노한 노동자들이다?’

천만에. 트럼프의 지지층은 상대적으로 부유한 백인들이다. 숫자를 보자. 미국인의 중위소득은 5만6000달러다. 출구조사에 따르면 클린턴과 버니 샌더스의 지지자들은 약 6만1000달러의 중위소득을 나타내고 있다. 반면 트럼프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의 중위소득은 7만2000달러로, 클린턴 지지층에 비해 1만달러가 높을뿐더러 평범한 미국인들에 비해서도 1만6000달러나 더 높다. 이것은 평균이 아니라 중위값이므로 ‘슈퍼 리치’들이 공화당을 지지해서 왜곡된 통계가 아니다. 주요 트럼프 지지층이 ‘가난하고 분노한 노동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샌더스가 나갔다면 이겼을 것이다?’

어림도 없다. 샌더스는 클린턴에게 경선에서 패배한 후보다. 특히 민주당의 ‘미래 지지 기반’인 히스패닉 및 소수자 집단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 경선 패배의 원인이었다. 승리를 위해서는 전국 득표력이 필요하다. 샌더스는 백인 밀집 지역인 ‘러스트 벨트’에서만 상대적 우위를 갖는 약한 후보였다. 게다가 샌더스가 트럼프와 1 대 1 토론에서 어떤 처참한 꼴을 당했을지 상상해봐야 한다.

 

미국 대선 관련 주요 이벤트를 모두 시청했기 때문에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샌더스는 트럼프의 상대가 못된다. 트럼프는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잽 부시를 문자 그대로 짓뭉개버렸다. “닥쳐”(You shut up)라며 손가락질을 해대고 목청을 높이는 트럼프를 부시 집안의 세번째 대통령 출마자는 감당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트럼프는 온갖 부동산 거래뿐 아니라 리얼리티 쇼와 프로레슬링 무대 등으로 단련된 ‘미디어 인파이터’다. ‘남자 대 남자’로 맞대결해서 그를 이길 수 있는 정치인은 없다. 점잖게 나오면 말을 안 들어먹고, 똑같이 진흙탕 싸움을 하면 이쪽이 더 손해를 본다. 클린턴처럼 소수자에 속하는 누군가가 품위 있는 태도로 맞서는 것만이 해법이었다. 샌더스는 트럼프를 이길 수 없었다.

 

정리해보자. 트럼프는 클린턴보다 최소 130만표 뒤졌지만 선거인단을 많이 확보해 승리했다. 게다가 트럼프 지지자들은 평균적인 미국인뿐 아니라 클린턴과 샌더스의 지지자들보다 잘사는, 교외에 거주하는 겉보기에 점잖은 백인 중산층들이다. 이번 미국 대선의 키워드는 ‘분노한 민중’이 아니라 ‘소수자를 혐오하는 기득권층’인 것이다.

 

그런데 왜 미국 대선을 ‘가난한 노동자의 반란’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이토록 많을까? 한국식으로 치자면 여성, 세월호 희생자, 삼성반도체 백혈병 환자,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외국인 노동자, 중국계 동포 등을 모욕하며 증오를 선동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일베 스타’가 바로 트럼프다. 일부 인사들은 그러나 승자에게 감정이입하여, 트럼프의 승리에 어떤 ‘진보적 가치’를 투영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는 안된다. 우리는 전 세계의 시민들과 연대하여 다양성과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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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8일 도널드 트럼프는 제일 강대국의 권좌를 차지했다. 다수의 미국인은 희망에 들떴고, 언제나 번영했던 1%는 안도했다. 또 다른 다수는 충격 속을 헤매고, 4%는 생계를 위협받으며, 1%는 린치 공포에 떤다. 1100만명의 불법체류자와 330만명의 무슬림이다. 여기에 약자로 구분되는 1%의 동성애자, 6%인 아시안, 18%를 차지하는 히스패닉, 흑인과 여성을 포함한다면, 선거 결과는 가히 재앙급이다. 물론 이들 중에도 트럼프 지지세력은 있다.

 

하지만 거리를 가로지르는 위협, 극도의 혐오는 네 편 내 편을 가르지 않고 히잡과 피부색만을 표적으로 삼는다. 인권단체인 남부빈민법센터(SPLC)에 신고된 증오행위만 개표 후 500건에 육박한다.

 

백악관 수석 전략가로 인종주의자 스티브 배넌이 지명되고 초강경 반이민 노선을 펼칠 제프 세션스가 법무부 장관에 내정됐다고 한다. 과연 미국 인구의 64%를 차지하는 백인의 실제 생활 속 우월감은 안전할까.

 

지난 15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위대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가 극우 인종주의자인 스티브 배넌 전 브레이트바트 대표를 백악관 수석전략가로 임명한 데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 시위자가 트럼프 가면 아래 ‘인종주의자, 편견쟁이, 사기꾼’이라고 쓰인 손팻말을 들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_ AFP연합뉴스

 

한국의 몇몇 진보 언론에는 트럼프 당선이 “소외된 백인 노동자들이 만든 합리적 선택”이라는 과잉해석까지 나오고 있다. 신자유주의 속에서 부글대던 노동 대중의 불만과 분노가 변화를 선택했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트럼프가 불쏘시개질을 한 분노가 ‘합리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은 수긍할 수 없다.

 

몇몇 진보 지식인들은 트럼프 안에 진보적 가치가 있다고도 말한다.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비판, 외교안보에서 미국의 실리를 우선하는 고립주의 노선이 주한미군 철수 같은 한국 내 일부 진보의 주장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트럼프는 철저한 보수이며 극우 포퓰리스트이다. 그가 말한 미국의 이익이 노동자와 농민과 소비자의 이익인지, 상위 10%를 위한 이익인지 봐야 한다. 트럼프 당선 이후 가장 환호한 그룹은 화석연료를 바탕으로 삼는 에너지산업, 군수산업, 그리고 월스트리트다. 거대 제약회사들도 즉각적으로 밝은 전망을 내놓았다. 트럼프가 말한 감세정책이 실행될 경우 최고 1%에게는 14%가 넘는 혜택이 돌아간다. 당연히 최상위 수혜자 명단에 트럼프의 이름도 오를 것이다.

 

미국의 달러 가치를 엄호하는 힘은 군사력이다. 버락 오바마의 대북 정책이 무르다고 비판해온 마이클 플린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낙점됐다. 미군 철수는 트럼프의 ‘흔들기’일 뿐이며, 방위비 추가 부담을 요구할 압박용 카드가 될 수 있다. 에너지 장관에 석유재벌 헤럴드 햄이 거론되는 데에서 보이듯, 화석에너지를 중심으로 한 긴장 국면 또한 우려를 낳는다. 파리 기후변화협약은 암초를 만났다. 세계를 위협하는 반동이다.

 

트럼프 승리의 진정한 주역은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자다. 선거 후 통계가 보여주듯 당내 경선에서 분열됐던 지지층은 트럼프에게 다시 모였다. 거기에 오랜 시간 정치를 외면하던 나이든 백인표가 돌아오며 외연이 확대됐다. 이들이 경제적 이익과 진보적 가치를 만드는 발판으로 트럼프를 선택했다고는 할 수 없다. 백인 중하위층은 실력 위주 경쟁질서 속에서 엘리트 중심으로 꽉 짜여졌던 사회에 대한 불만을 트럼프 선택으로 드러냈다. 여기에 트럼프는 또다시 배신의 선택을 준비한다. 성과 위주 교육을 대표하고, 교원노조와 교수들의 집단적 반발을 샀던 미셸 리가 교육부 장관으로 거론된다.

 

선거 내내 트럼프가 재생한 것은 1960년대 리처드 닉슨과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이 백인 노동자들에게 읊어댔던 3대 선동이다. ‘민권 운동 덕에 사람이 된 흑인이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다’, ‘페미니즘에 물든 여성이 남성의 권위를 깔아뭉갠다’, ‘반전 운동의 주역들은 사회주의자이며 대학을 나온 진보 엘리트들로 너희를 멸시할 것이다’. 트럼프는 이를 ‘흑인들에게 퍼주기를 하는 오바마케어 탓에 백인 주머니가 털렸다’, ‘일자리를 빼앗는 이민자’, ‘성폭행범 라티노와 테러리스트 무슬림’으로 버전업했다.

 

여기에 동참한 세력은 백인만이 아니다. 경제력을 갖춘 이민 1세대뿐 아니라 1.5세, 2세 전문직 종사자들도 끼어 있다. 사다리 걷어차기가 작동한 것이다. 상시적인 구조조정 속에 정보기술(IT) 업계는 값싼 무경력자, 인도나 중국, 남미 등지에서 온 고학력 이민자로 대체되고 있다. 의료계나 연구직도 마찬가지다. 트럼프의 정책은 사이다처럼 향수를 자극했고, 먼저 이민 온 세대들은 트럼프를 용인했다.

 

노엄 촘스키는 지난 14일 선거 결과를 분석하며 ‘다정한 파시즘’이라는 말을 썼다. 오래도록 끓고 있던 분노와 두려움을 ‘솔직함’으로 폭발시키고, 그 열기에 약자를 제물로 던져버리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의 탄생. 욕망은 논리적이지 않기에, 세계 곳곳의 분노는 극우 정당들에 손을 내주고 있다.

 

우리의 광장은 뜨겁지만 어느 순간 각자의 희망에 따라 분열할 것이다. 그러하기에 지금 광장에서 거둬내야 할 승리는 악을 제거하는 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악을 무너뜨리고 세워낼 정의의 조각을 맞춰내야 한다. 각자 꿈꾸는 나라의 세세한 모양을 맞추고 서로에게 스며들어야 한다. 더 이상 광장의 언어가 정치의 언어에 죽어가는 치욕을 허락할 수는 없다.

 

안희경 | 재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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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8일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됐다. 미국의 지성잡지라고 일컬어지는 ‘뉴요커’는 트럼프의 당선을 ‘미국의 비극’이라고 표현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분석을 실었다. 각기 다른 전문가들의 분석이 얼마만큼 정확하고 포괄적인지에 대한 논의는 제쳐놓고라도, 내가 보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트럼프가 지닌 ‘가치관’이다.

 

그의 삶이나 선거기간 동안 그가 보여준 연설과 행동에서 드러난 그의 가치관은 여성혐오, 인종혐오, 성소수자혐오, 이슬람혐오, 외국인혐오 등 갖가지 ‘혐오주의’를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이 결점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트럼프가 지닌 이러한 지독한 문제점 때문에 적어도 트럼프의 당선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나는 가지고 있었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그가 지속적으로 표출해 온 남성 중심주의, 백인 중심주의, 이성애 중심주의, 기독교 중심주의, 자국민 중심주의가 인종, 피부색, 젠더, 국적, 종교, 성정체성 등에서 유래하는 ‘다름’에 대한 적대감을 제도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제도화된 적대감’은 다양한 방식으로 타자에 대한 혐오를 자연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합법화’시키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에 항의하는 시위가 12일(현지시간) 뉴욕, 캘리포니아, 필라델피아, 오리건 등 미국 곳곳에서 계속됐다. 1만명이 시위에 나선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도심에서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들이 “나의 대통령이 아니다”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_ UPI

 

미국은 21세기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어서 ‘신제국’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미국은 단순히 모든 나라 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대통령은 한 나라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적 삶을 좌우할 만큼 영향력이 막강하다. 물론 트럼프는 전통적 의미의 파시즘을 행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가치관을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현대판 파시즘을 국내외의 다양한 소수자들에게 행사할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여성, 이주민, 이슬람교도, 성소수자, 유색인종 등 많은 이들을 제도적으로 ‘주변화’하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범죄화’함으로서, 미국은 환대사회가 아닌 적대사회로, 포용사회가 아닌 배제사회로의 이행을 정치적으로 제도화할 위험이 있다. 미국이 이렇게 타자에 대한 혐오사회로 이행하면 이 세계 곳곳에 다층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과연 누가 이러한 혐오적 가치를 노골화하고 있는 트럼프를 지지했는가를 조명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도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트럼프의 당선을 가능하게 한 막강한 세력은 ‘대학교육을 받지 않은 하층 백인’, 특히 남성들이었다. 트럼프가 여자였다면 또는 그가 엄청난 부를 소유한 백인이 아니었다면, 그의 당선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학교육을 받지 않은 백인 남성’들이 적대와 혐오를 노골화한 남성 트럼프를 지지하고, 그의 경제적 부와 성공을 자신들의 판타지로 삼았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중요하다. 인종, 계층, 성별이 작동한 이 지점에서 내가 말하려는 것은 단순한 학력주의가 아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비판적 사유하기’를 주요 목적으로 삼는 교육을 통해서, 평등과 정의, 그리고 포용과 관용을 배우는 것의 중요성이다. 인류의 역사는 인류의 보편가치인 정의, 평등, 포용의 관점에서 볼 때 언제나 진보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경제적인 ‘보이는 발전’이 언제나 인간됨을 의미하는 가치들의 확산인 ‘보이지 않는 발전’과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경제적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특정한 그룹에 대한 인권 유린과 탄압이 자연적인 것으로 제도화될 때 이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은 ‘비판적 사유’와 그 사유에 근거한 연대적 실천이다. 그래서 ‘사유-판단-행동’은 우리가 이 세계와 연계되는 매우 중요한 세 가지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다.

 

‘이 세계는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다.’ 장-뤽 낭시의 말이다. 그런데 이 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생태위기, 기아, 전쟁 등 ‘보이는 파괴’만이 아니다. 모든 인간의 권리 확장, 평등과 정의와 같이 ‘보이지 않는 가치들’의 붕괴도 심각하게 이 세계의 파괴에 기여하고 있다. 우리는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을 배우고, 그 사유에 근거하여 판단하고 행동하는 시민으로 스스로 성숙하는 것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적대와 혐오사회로의 이행에 다층적으로 저항하고 실천하기 위한 힘을 기르게 될 것이다.

 

강남순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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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미국 시민인 당신을 위로할 처지가 아닌 줄은 압니다. 그러나 서로 슬픔과 고통을 나누면 한결 나아질 거라고 믿습니다. 당신은 평생 여자의 꽁무니나 쫓고 혐오발언을 일삼던 자가 대통령 된다는 사실에 한숨짓습니다. 로비스트·가족으로 인수위원회를 구성한 트럼프를 보며 다시 절망하는 당신. 그런 당신에게 한국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위안이 되었으면 합니다.

 

트럼프는 성인입니다. 수세에 몰린다고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가업을 일궜다’며 동정심을 자극하지 않았습니다. 손자를 봤을 나이인데도 위기마다 고아라는 걸 내세우거나 “외롭게 살았다”는 어리광으로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습니다. 최고 권력을 맘껏 누리면서도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국정을 이끌지 못할 만큼 미성숙하지도 않고, 사람과 마주하기를 꺼리는 아이처럼 낯가림이 심하지도 않습니다. 아직도 당신의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면, 우리 한국인을 떠올려 보세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트럼프타워 앞에서 반트럼프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다. 뉴욕 _ AFP연합뉴스

 

당신은 트럼프의 아들·딸·사위가 공직을 맡는 걸 싫어하겠지만, 그들의 지위에 합당한 책임은 물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활동은 일상적으로 평가받고 감시받을 테니까요. 적어도 박근혜처럼 하지는 않을 겁니다. 박근혜가 어떻게 했느냐고요? 가족을 감시한다며 청와대 특별감찰관제를 도입했죠. 그래서 우리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려 있는 동안 ‘또 다른 가족’이 감시망 밖에서 활개 칠 수 있게 마당을 펼쳐주었습니다.

 

트럼프가 인종·여성차별주의자이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분노한 노동자를 대변하기도 했죠. 하지만 박근혜가 대변한 건 죽은 박정희·최태민입니다. 산 사람 중에선 딱 한 명 있습니다. 최순실. 이게 4년간 발각되지 않고 지속될 수 있었던 건 바로 박근혜의 강점, 잘 속이고 잘 감추는 능력 덕입니다. 다른 목적을 위해서 눈 깜짝 안 하고 말하는 솜씨를 트럼프는 절대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군요. 트럼프의 흠은 너무 솔직하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당신이 트럼프 대통령 치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대략 짐작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물론 그가 자신의 공약대로 하겠다고 말함으로써 불안을 부추기고, 말한 대로 안 하겠다고 함으로써 혼란을 조성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조정기를 거치면 줄기가 잡히겠지요. 요즘 취임도 하지 않은 트럼프가 벌써 공약을 현실에 맞게 수정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자고로 짖는 개는 물지 않습니다. 설사 물려 해도 짖는 소리는 미리 대처할 수 있는 시간을 줍니다. 다행히 미국에는 제 역할을 하는 감시견이 많습니다.

 

미국 주류 언론은 한국 주류 언론처럼 레임덕이 없는 한 실정을 눈감아주는 비겁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FBI 같은 보안기구도 권력에 종속된 한국의 검찰·국정원 같지는 않습니다. 부를 독차지하면서도 감옥을 들락거리는 바람에 돈 뜯기 쉬운 재벌 총수라는 독특한 직업도 당신 나라에는 없습니다. 먹이가 없으니 박근혜·최순실 같은 사냥꾼도 없겠지요. 공화당도 대통령을 무조건 추종하는 새누리당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와는 달리 당신에게는 트럼프를 달래거나 바로잡거나 피할 기회가 있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4년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깜깜했습니다. 재벌 총수를 독대해 강압적으로 돈을 모으는 전두환·노태우 수법을 쓸 줄 우리가 몰랐던 한 가지 이유는, 그것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총리, 장관, 참모들이 나랏일을 알아서 잘 챙기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제야 드러났지만 그 집단은 명목상의 지위만 가진 종이 정부, 일하는 척만 하는 은폐용 정부였습니다. 대통령 주치의조차 진짜를 따로 둘 만큼 그들은 빈틈없이 이중정부를 운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동안 종이 정부에 얼마나 묻고 따졌는지 아십니까? 그럼에도 하나도 고쳐지지 않은 이유가 뭘까 얼마나 궁금했는지 아십니까? 알고 당하는 것과 모르고 당하는 것은 다릅니다. 개가 짖지도 않고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발을 물어뜯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기분이 무척 더럽죠.

 

여기 웬만해서는 짖지 않는 개들이 사는 조용한 동네가 있습니다. 도둑 없는 동네인 줄 알고 사람들이 경계심 풀고 대문 열어 놓고 삽니다. 그사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 도적이 동네를 다 털어갑니다. 뒤늦게 온 동네 개들이 짖습니다. 보통 개는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따라 짖기도 하는데 따라 짖지도 못하고 끙끙대는 강아지 한 마리가 있군요. 새누리라고 합니다. 자, 이런 상황이면 당신은 우리보다 처지가 조금은 나은 겁니다.

 

그러나 이건 어떻게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이제 시작이지만, 우리는 어쨌든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대근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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