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갑오년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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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정동칼럼]갑오년의 추억

by 경향글로벌칼럼 2014. 10. 30.

어느덧 갑오년을 마무리하는 시절로 접어들었다. 120년 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고 청일전쟁이 이어지며 갑오개혁이 시도된 해이다. 갑오년의 기억이 뜨겁게 이어진 곳은 중국이다. 중화 5000년의 꿈에서 깨어나는 결정적 사건인지라 시진핑 주석이 나서서 일본에 당한 패배를 “심장을 후벼 파는 고통”으로 묘사하며 애국의식을 고취하고 있고, 유공도에 있는 갑오전쟁박물관에는 올해 최대 인파가 몰린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반면, 일본은 갑오년의 영광을 추억한다. 급격한 근대화로 중국을 꺾고 동양의 맹주로 발돋움하는 자부심을 강조하는 유슈칸은 야스쿠니신사 부속 기념관으로서 올해도 끊임없이 정치적 논란을 일으켰다.

한국에서 갑오년의 기억은 청일전쟁보다는 동학농민전쟁에 집중되어 왔다. 갑오년의 사건은 4월 농민군과 정부군 사이의 전라도 황토현 전투로 시작하여 조선정부의 요청에 의해 청군이 한반도에 상륙하고 일본군도 경쟁적으로 상륙하면서 양국 간 전쟁으로 비화하여 평양전투와 황해해전을 거쳐 산동반도 위해전투에서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1895년 4월 시모노세키조약으로 마무리된다. 한국은 4월 농민군의 봉기로부터 12월 전봉준의 체포까지 8개월간 사상 최대의 저항운동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이 시기의 해석은 1994년 100주년 기념사업에 의해 동학란(亂)에서 동학농민혁명으로의 복권으로 마무리된 반면 청일전쟁은 마치 남의 전쟁처럼 잊혀졌다. 그러나 한국이 기억하는 동학농민전쟁과 중국과 일본이 기억하는 청일전쟁은 갑오년 동아시아 전쟁이란 동전의 양면이라 할 수 있다.

갑오년은 단순히 농민 혁명과 일본 승리의 해가 아니라 예(禮)를 명분으로 하여 천하를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으로 나누는 전통 위계질서로부터 부강을 좇는 주권국가 간 제국주의 경쟁으로 국제질서 존체가 변환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조선이 자주독립국의 지위를 부여받음으로써 중원에 대한 조공국 지위는 소멸되었고 일본이 대만을 식민지화하여 서양 제국주의 국제질서의 일원이 됨으로써 2000년 넘게 유지되어온 동아시아 전통 질서는 붕괴하였다.

청일전쟁은 또한 동아시아를 구미 자본주의, 즉 런던의 국제금융시장에 편입시키는 결정적 결과를 가져왔다.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중국은 은화 2억3000만냥의 거액의 배상금을 영국은행(Bank of England)의 일본정부 계좌에 예치하기로 합의했고, 일본은 이를 일본은행의 금화준비고(gold reserve)로 전환시켜 일본 엔화의 금태환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일본은 금본위제란 19세기 유럽 문명의 핵심제도를 수용하여 런던 및 여타 유럽 자본시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1904년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유럽 시장에서 막대한 전비를 조달할 수 있었던 데 있다. 한편, 중국은 배상금을 갚기 위해 유럽으로부터 개발이권, 조차권 세일에 나섰고, 외채를 끌어들인 결과 유럽 자본에 철저히 종속되는 반식민지화의 참담한 상황을 맞이했다. 동아시아는 금본위제, 런던의 자본시장, 자유무역체제란 자본주의체제와 제국주의 국제질서하에서 해체되어 갔다.

갑오년 동아시아 120년 '역사의 수레바퀴' (출처 : 경향DB)


21세기 갑오년을 맞이하여 시진핑 주석의 절치부심(切齒腐心)은 일본에 대한 복수 차원이 아니라 보다 큰 질서 변화의 꿈을 위한 준비이다. 중국몽은 기존의 미국 주도 동맹네트워크를 넘어 자국이 중심이 된 아시아 다자안보체제와 시장자본주의가 아닌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를 모색하고 있다. 아베 신조의 일본도 역사수정주의로 과거의 영광만을 추억하고 있지 않다. “국제협조주의에 기반을 둔 적극적 평화주의”의 기치하에 아시아와 지구 공간을 넓게 쓰며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중국에 대항하고 있다.

과거의 기억은 미래의 기대로 이어진다. 갑오년 한국이 한반도 농민전쟁의 추억을 넘지 못하는 한 미래의 열망도 그만큼에 그칠 것이다. 대국의 큰 그림을 읽어내고 넓고 길게 사고해야 할 때 한국은 우물 안 개구리의 시야로 한반도란 좁은 틀에 갇혀 눈앞의 이익을 놓고 서로 싸우고 있다. 기대했던 청마(靑馬)의 해는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


손열 |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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