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렬의 신한반도 비전]한·미 ‘굿 이너프 딜’의 성공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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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조성렬의 신한반도 비전]한·미 ‘굿 이너프 딜’의 성공조건

by 경향글로벌칼럼 2019. 4. 2.

오는 11일 평양에서 김정은 2기체제를 알리는 최고인민회의 제14기 1차회의가 열리고, 워싱턴에서는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비핵화에 관해 어떤 입장을 내놓을지 주목된다. 여기서 김 위원장이 먼저 ‘새로운 길’이라도 발표한다면 한·미 정상회담은 사후약방문이 될 위험성도 있다. 서둘러 대북특사를 보내 북한의 입장을 먼저 듣고 한·미 정상회담에 임하는 것이 북한의 돌출발언을 막고 한·미 정상회담의 성과도 높일 수 있는 길이다.

 

문제는 다음부터다. 하노이 회담에서 확인된 북·미의 입장차이가 커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족시킬 만한 방안을 찾는 게 중요하다. 정부는 ‘굿 이너프 딜’(충분히 괜찮은 거래)을 통해 북한과 미국 간 입장차이를 좁히려 한다. 먼저 포괄적 로드맵에 합의한 뒤, 단계적 이행을 해나간다는 구상이다. 이는 스몰딜을 한두 차례 실시해 조기수확을 거둔 뒤 완전한 비핵화의 최종목표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굿 이너프 딜’의 개념만 보면 비건 대북정책특별대표가 발표한 1월31일의 스탠퍼드대학 연설과 닮았다. 비건 대표는 먼저 모든 플루토늄재처리,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을 해체·파괴하고, 어느 시점에서 대량살상무기 및 미사일 프로그램 전체에 대해 포괄적으로 신고하고, 궁극적으로 핵분열물질, 핵무기, 미사일, 기타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파괴해야 한다고 밝혔다. 비건이 나중에 부인했지만, 사실상 단계적 접근이었다.

 

‘굿 이너프 딜’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단계적 접근이면서도 단계적 접근이면 안된다. 미국 강경파들은 과거 6자회담이 단계적 접근법을 채택하는 바람에 실패한 것으로 보고 일괄타결, 단번이행을 주장한다. 북한은 단계적, 동시행동적 접근법을 내놓고 있지만, ‘단계적’의 의미가 타결·이행 모두 단계적인지, 이행만 단계적인지 불확실하다. ‘동시적, 병행적’ 방식은 미국과 북한이 공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굿 이너프 딜’이 성공을 거두려면, 우선 지난 하노이 회담에서 드러난 ‘영변’의 공동정의와 ‘하나 더’에 대한 포괄적 합의가 만들어져야 한다. ‘영변’에 관해 북한은 영변 핵단지 내 모든 시설로 국한한 데 비해 미국은 핵물질 생산과 관련된 영변 내외의 모든 시설로 이해한다. ‘하나 더’의 의미를 북한은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로 보면서 ‘영변’ 해체 이후에나 할 일로 보는 반면, 미국은 ‘모든’ 생화학무기와 탄도미사일도 포함되어야 하며 ‘영변’ 해체과정 중에 포괄적으로 신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폼페이오·강경화 장관 악수 강경화 외교부 장관(왼쪽)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3월 29일(현지시간) 워싱턴 국무부 청사에서 악수하고 있다. 워싱턴 _ AFP연합뉴스

 

며칠 전 한·미 외무장관이 만나 비핵화의 최종목표에는 이견이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 자리에서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 핵물질 생산시설 외에 생화학무기와 중·단거리 탄도미사일을 포함하기로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유엔안보리 결의안에는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프로그램, 그밖의(any other) 대량살상무기와 미사일 프로그램”을 CVID 방식으로 처리한다고 되어 있다. 이처럼 유엔안보리는 생화학무기와 미사일 프로그램의 폐기를 포함시켰지만 주요대상으로 보고 있지 않아 포괄적 합의는 가능하다.

하지만 ‘굿 이너프 딜’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비핵화 범위와 대상을 규정하는 포괄적 합의만으로는 부족하고 시기(timing)와 순서배열(sequencing), 이행방법을 담은 북·미 간의 타결이 필요하다. 하노이 회담에서 미국이 정상끼리의 일괄타결을 요구했던 만큼, 먼저 북·미 또는 남·북·미 고위급회담에서 한두 차례 부분적인 타결과 이행을 통해 조기수확을 거둔 다음 제3차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해 일괄타결과 최종적인 이행으로 완전한 비핵화를 달성한다. 일괄타결을 부인하지 않고 정상회담의 몫으로 남겨둠으로써 트럼프 대통령의 체면도 살려줄 수 있다.

 

그렇다면 북·미 또는 남·북·미 고위급회담에서 우선적으로 가능한 타결의 내용은 뭘까? 제재 ‘면제’와 영변 핵시설 일부를 교환하는 타결이다. 북측이 요구한 제재 ‘해제’는 부분적일지라도 대북 국제제재망을 약화시킬 수 있다. 반면 남북관계에만 국한되는 남북경협사업에 대한 제재 ‘면제’는 국제제재망의 약화 우려가 없다. 최선희 부상이 3월15일 회견에서 밝힌 스냅백 조항을 도입한다면, 제재 ‘면제’라 하더라도 북한의 약속불이행 시 원상회복이 가능하다.

 

한·미 간에는 여러 차례 협의를 통해 하노이 회담의 경험과 정보를 공유하고 있지만, 남북과 북·미 간에는 아직 이렇다 할 소통이 안되고 있다. 불신 탓에 미국이 요구하는 일괄타결, 단번이행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6자회담 실패 경험 때문에 단계적 타결과 이행 방식도 트럼프 대통령이 수용할 가능성이 없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이 성과를 거두려면 미국이 내건 원칙을 존중하면서 현실 조건을 접목하는 실용적 자세가 필요하다. 몇 가지만 보완한다면 ‘굿 이너프 딜’은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성렬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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