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민주화 시위의 ‘속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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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박은경의 특파원 칼럼

홍콩 민주화 시위의 ‘속살’

by 경향글로벌칼럼 2019. 8. 21.

올여름, 중국 대륙은 드라마 <장안십이시진(長安十二時辰)>으로 뜨거웠다. 새로운 줄거리는 아니다. 당나라 수도 장안성에 자객들이 침투해 장안성이 위험에 빠지자 군인 출신 사형수를 비밀 투입해 위기를 해결한다는 내용이다. 옛 시간 단위 ‘시진’을 끌어와 24시간 동안 일어나는 일을 속도감 있게 그려냈다.


미국 드라마 <24시>에서 구성을 따온 듯한 이 드라마가 ‘중국판 짝퉁’으로 전락하지 않은 것은 철저한 역사 고증 덕분이다. 시간적 배경이 되는 정월대보름의 풍속을 상세히 묘사하고 당나라 시대 화장법과 복식 등은 원형에 가깝게 고증했다. 단순한 역사 드라마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라는 찬사가 나왔다. 이 드라마는 다양한 기록을 근거로 제시한다. 직책이나 풍속을 설명하는 자막이 유독 많다.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했지만 정사(正史)만 따르지는 않았다. 원작 소설 작가는 안녹산의 난에 대한 민간의 기록인 ‘안녹산 사적’을 참고했다고 밝혔다. 


아무리 훌륭한 역사라도, 혹은 참혹한 일이라도 기록돼야 기억된다. 많을수록 정확해진다. 당나라 황실로서 안녹산의 난은 반역의 역사다. 편파적일 수 있는 기록은 안녹산 사적이라는 민간의 목소리가 보완한다.


중국 정부가 발표하지 않고, 관영 매체가 보도하지 않은 목소리를 기록해 팔던 서점이 홍콩에 있었다. 홍콩 쇼핑몰이 밀집한 코즈웨이베이에 위치한 퉁러완 서점이다. 중국 본토에서 구할 수 없는 금서(禁書)를 살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해 중국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정치 비화를 담은 서적은 물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왕치산 부주석 등 지도자들을 풍자하는 책도 팔았다. 중국 정부로서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2015년 이 서점의 주주와 직원 5명이 갑자기 실종됐다. 몇 달 만에 나타난 서점 점장은 중국 공안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고 폭로했다. 이 서점은 문을 닫았다.


홍콩 시민들은 범죄인 인도 조례(송환법)가 통과되면 제2, 제3의 퉁러완 서점 사건이 나타날 것이라고 보고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일국양제로 홍콩의 자치권이 보장될 줄 알았지만 중국의 의지에 따라 언제든 하나의 중국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홍콩인들이 직접 뽑지 않고 중국의 입김에 따라 좌우되는 행정장관 선거 제도 문제도 지적한다. 송환법 반대 시위가 보통 선거를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으로 번진 이유도 이 때문이다.


홍콩 시민들이 송환법을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인 18일 밤 정부청사 앞 차도에 '광복홍콩 시대혁명'이라고 적혀 있다. 강윤중 기자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대만이 출판·언론의 자유가 충분치 않았던 시절에 자신도 책을 사러 홍콩에 갔다고 했다. 자유의 공기가 가득하던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후 자유를 잃었다. 금서를 살 수 있는 곳은 홍콩에서 대만으로 바뀌었다.


지난 17일 퉁러완 서점을 가봤다. 대로에 있는 푸른색 간판은 여전했지만 철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영업을 하지 않는다는 안내문 밑에는 ‘홍콩 힘내라’ ‘지지한다’는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서점의 문제가 아니라 자유의 문제다.


중국 관영매체들은 오성홍기를 흔드는 친중국 시위를 적극 보도한다. 친중국 시위는 단체 참여가 많다. 지난 17일 집회에서는 후이저우, 충칭, 광저우 등 중국 각 지역의 향우회가 플래카드를 들고 와 여기저기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중국 매체들은 홍콩의 송환법 반대 시위에 대해서는 최대한 적게, 일부분만 기록한다. 주로 폭도나 폭력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18일 송환법 반대 시위 현장에서 많은 이들을 만났다. 현장에서 노트북을 켰을 때 누군가 다가와 말없이 물을 건넸고, 우산을 씌워줬다. 난간을 넘을 때 손을 내밀어 잡아줬고, 한국어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들의 따뜻한 마음까지는 기사에 담지 못했다.


이들의 목소리는 더 자세히 기록돼야 한다. 폭도라는 짧은 단어로 표현해서는 안된다.


<베이징 | 박은경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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