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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신인이라던 대통령은 알고 보니 외교의 달인이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세련된 외교 매너로 서구 언론의 혼을 쏙 빼놓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마크롱이 국제사회의 새로운 리더로 부상하고 있다고 썼고, 영국 가디언은 마크롱에게 ‘외교적 제스처의 장인(master)’이라는 수식어를 선사했다. 최근 마크롱은 독일·영국 등 다른 유럽 주요국 정상들보다 더 빈번히 뉴스 머리기사를 장식하고 있다.

 

마크롱이 주목받는 이유는 그가 상징을 적절히 활용해 정치와 외교에 서사를 불어넣기 때문이다. 상징 활용은 정상 외교의 각종 이벤트에서 두드러진다. 마크롱은 지난해 9월 그리스 아테네를 방문해 유럽통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유럽연합(EU)의 미래상을 제시할 곳으로 민주주의가 태동한 아테네보다 더 적합한 장소가 어디 있었을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프랑스 혁명기념일인 바스티유 데이(7월14일) 행사에 초청한 것도 세심하게 기획된 작품이다. 이날 마크롱은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트럼프에게 보여줌으로써 프랑스군의 위용을 과시했다. 이달 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말(馬)을 선물한 것이나 영국에 11세기 자수작품 ‘바이외 태피스트리’를 대여하기로 한 결정도 마크롱이 상징 외교에 들이는 정성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 사례들이다.

 

의미 있는 선물과 이벤트로 감동을 안기다가도 분쟁과 갈등에 예각을 세우고 직설을 아끼지 않는 것 역시 마크롱 외교의 특징이다. 특히 공동 기자회견에서 상대국 정상 면전에 ‘돌직구’를 던지는 방식을 즐겨 사용한다. 지난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공동 기자회견에서는 자신에 대한 허위 기사를 유포한 러시아 매체를 비난했고, 지난달 초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의 공동 기자회견에선 미국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선언한 것을 비판했다. 이런 외교술 덕분에 프랑스는 할 말은 하는, 갈등의 중재자이자 해결사라는 평판을 쌓아가고 있다.

 

프랑스의 위상이 올라가는 사이, 거의 모든 국제문제의 해결사를 자임했던 미국의 신뢰도는 이울고 있다. 마크롱이 상징과 직설 사이에서 솜씨 좋게 줄타기한다면 트럼프는 막말의 ‘외길 인생’을 걸어가고 있는데, 막말도 대륙 하나를 들었다 놓을 정도의 폭탄 발언만 골라서 하고 있다.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이 입과 트위터로 쏟아내는 무신경하고 부주의한 발언은 전 세계에 혼란과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 아이티와 아프리카 국가를 ‘거지소굴(shithole)’이라 부른 것은 아프리카 전역에서 정부 관계자와 시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내 핵단추가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것보다 크다”는 말은 트럼프 정신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논란과 실제 건강검진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북한은 화염과 분노에 직면할 것”이라며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켰던 것도 트럼프의 거친 발언이 초래한 비용이다. 백악관에서 막말이 나올 때마다 골치를 앓았을 미국 언론은 트럼프의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며 “거의 매주 드라마를 찍었다”고 평가했다. 미국 시민들이 트럼프에게 느끼는 피로감은 수치로 구체화되고 있다. 취임 1주년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국정수행 지지도는 40%에 그쳤다. 외교 업무 수행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답변은 56%, 다른 나라 정상들이 트럼프를 존경하지 않을 것이라는 답변도 65%에 이르렀다.

 

마크롱은 최근 어느 인터뷰에서 트럼프의 거지소굴 발언을 비판하며 “그는 고전적(classical) 정치인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고전적인 정치 문법을 모르는 트럼프에게 마크롱 수준의 외교 수완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트럼프의 임기는 3년 더 남았다. 그가 무분별한 발언으로 평지풍파 일으키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설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국제부 | 최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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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활짝 웃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왼쪽에서 나타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흑백 이미지를 가리기 시작한다. 트럼프가 오바마를 완전히 가리자 ‘사상 최고의 일식(The Best Eclipse Ever!)’이란 자막이 뜬다. 지난해 8월24일(현지시간) 트럼프가 트위터에서 리트윗한 4장의 연속사진이다. 당시 미 언론들은 트럼프가 이틀 전(8월22일) 애리조나주 연설에서 강성 발언을 쏟아낸 뒤 만들어진 사진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애리조나주 연설은 이렇다. “멕시코 국경장벽 건설을 위해서라면 연방정부를 셧다운(일시폐쇄)할 수도 있다.”

 

트럼프가 취임 1년을 맞은 20일, 그의 공언대로 연방정부가 셧다운됐다. 1년 내내 ‘오바마 지우기’에 열중해온 트럼프가 이번에는 오바마 재임 시 연방정부 셧다운을 재현한 건가. 뜯어보면 다르다. 2013년 10월에는 민주당이 다수인 상원과 공화당이 다수인 하원이 대립하다 예산안 통과에 실패했다. 이번에는 상·하원 모두 여당인 공화당이 지배하는데도 셧다운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셧다운을 앞두고 실시된 ABC방송·워싱턴포스트 여론조사에서 ‘어느 쪽에 정치적 책임이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48%가 ‘트럼프와 공화당’을 꼽았다. 의회전문 매체 더힐은 ‘트럼프셧다운’ 해시태그(#TrumpShutdown)가 전 세계적으로 검색어 최상위에 올랐다고 전했다.

 

여론 흐름이 트럼프에 불리한 데는 또 다른 요인도 있을 터다. 이번 사태의 쟁점은 ‘다카(DACA)’다. 다카는 오바마가 내린 행정명령으로, 부모를 따라 미국에 불법 입국한 청소년들의 추방을 유예하고 노동허가증을 발급해주는 정책이다. 트럼프가 폐기를 선언하면서, 불법 체류 청소년 약 80만명이 추방 위기에 놓였다. 민주당은 다카의 부활에 준하는 보완입법을 요구한 반면, 공화당은 이를 거부하고 트럼프는 멕시코 장벽 건설 예산을 반영해야 한다고 맞섰다. 지난해 8월 NBC 여론조사에선 64%가 다카 유지 쪽에 손을 들었다. 2017년 미국인들이 구글에서 가장 많이 검색한 단어도 ‘다카’였다. 전임자의 자취는 이어받을 수도 있고 지울 수도 있다. 하지만 주권자의 뜻을 외면했다간 큰코다친다.

 

<김민아 논설위원>

 

Posted by KHross

-2018년 1월 19일자 지면기사-

 

2018년 벽두부터 꽁꽁 얼어붙었던 한반도에 해빙의 조짐이 일고 있다. 25개월 만에 남북대화가 복구되었다. 아직은 설익은 희망사고라고 할 수 있지만, 만화처럼 비현실적이고 삼류영화의 막장대화처럼 북·미 간의 말폭탄이 난무했던 지난해를 생각하면 이 정도의 기대와 들뜸은 허용될 만하다. 물론 해결된 것 하나 없고, 장애물은 끝도 없이 많아 보인다. 평창 올림픽까지는 어떻게든 갈 수 있겠지만, 한반도의 지속가능한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목표는 여전히 아득하다. 북한이 지금까지는 놀라울 정도로 협조적이지만 여차하면 무산될 수 있는 위태함이 도사리고 있다.

 

북한 외에도 안팎의 훼방자들이 걱정을 더한다. 이들은 겉으로는 나라를 걱정하고 실패를 우려하는 듯하지만, 속내는 성공을 향한 국면전환을 두려워한다.

 

먼저 해빙무드에 찬물을 끼얹는 내부의 훼방자다. 김정은의 신년사 발표시점부터 한·미관계 이간질을 위한 통남봉미 전술이라고 비판하더니, 평창을 인질로 금품을 요구할 것이며, 위장평화공세로 이미지 세탁과 비핵화압력을 비껴가려는 북한을 문재인 정부가 도와주며 호구인증에 나섰다면서 공세를 늦추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예단이기는 하나 고려할 부분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비판의 동기가 성공을 위한 우려가 아니라 판 뒤엎기의 예열이라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멈추지 않고 이미 거짓으로 판명난 개성공단의 핵개발 자금 유용이라는 프레임의 부활, 남북관계 개선은 곧 한·미동맹의 붕괴라는 근거 없는 흑백논리가 어김없이 뒤따른다.

 

분단고착세력들은 평창 올림픽과 남북대화의 성공보다 미국의 심기가 중요하며, 한반도의 해빙보다는 전쟁위기의 한파를 오히려 편안해한다. 왜냐하면 얼음이 녹으면 이들의 기득권은 수장되기 때문이다.

 

협상국면이 달갑지 않은 외부의 훼방자는 미국의 강경파들이다. 그들의 사고체계로는 북한이 변할 수 없고, 또 변해서도 안된다. 수용할 수 있는 변화는 북한의 항복 또는 붕괴뿐이다. 따라서 현재의 대화국면을 북한의 계략이거나 한국 종북진보의 반동으로 인식한다. 평화를 상징하는 올림픽을 방해한다는 오해를 사지 않으려고 벙어리 냉가슴 앓고 있으나, 내심 ‘탈선’을 기다리며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 사드 조기 배치로 압박했었던 그들이 이번에는 샴페인에 취한 탓이라고 매도했다. 다행히 트럼프가 평창 올림픽 기간에 한·미 군사훈련을 연기하는 데 동의했고 문 대통령을 100% 지지한다고 말함으로써 일단 이들의 입은 닫혔다. 물론 지난해 전쟁위기를 한껏 고조시키던 당사자인 트럼프의 변화조차도 신뢰하기는 어렵다. 무력시위를 통한 위협전략에 피로감이 생길 즈음에 협상이라는 다른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판단 정도일 수 있다.

 

이렇듯 주어진 기회는 제한적이며 시한부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남북관계 개선이 부여하는 외교 지렛대의 위력을 경험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 외교농단의 결과로 코리아 패싱을 말하던 때와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다. 미국은 한국이 과연 북한을 끌어낼 능력이 있는가를 시험하고, 북한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상대인 미국을 한국이 견인할 수 있는지 주시한다. 중국 역시 북·중관계가 최악인 동시에 북한의 전략적 유용성은 도리어 커지는 딜레마 상황에서 한국이 과연 북·미를 설득해 문제해결의 돌파구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지켜보고 있다.

 

우리의 외교력을 최대치로 발휘해 시한부 국면을 지속가능한 체제로 만들기 위해 양다리가 아닌 승부를 걸어야 하는 결단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훼방자들에게 더 이상의 여지를 줘서는 안되며 당황할 정도의 속도와 규모로 대화국면의 비가역을 확보해야 한다. 지뢰밭을 제거하려면 하나씩 조심스럽게 제거하는 방법도 있지만, 지금은 폭발을 통해 한꺼번에 제거하는 방법이 필요한 때다. 미국을 너무 의식해서 길목마다 비핵화의 단호함을 언급함으로써 스스로 장애물을 조성할 필요는 없다. 해빙무드를 이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북한의 핵보유에 대해 벌거벗은 임금님의 우화에 갇히고, 아라비안나이트처럼 연명을 위한 이야기만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어차피 훼방자들은 약간의 파행만 있어도 한·미동맹 위기를 들먹이고 주한미군 철수카드로 위협할 것이다. 현재 배후에서 단일팀 구성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본질을 흔드는 선동은 앞으로 비핵화를 전제조건화하면서 북한을 자극하는 동시에 미국 강경파의 동조를 얻어 문재인 정부를 코너로 몰아붙일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비핵화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비핵화의 단일 테이블만 고집하기보다 다양한 테이블을 동시 추진함으로써 완충시켜야 한다. 치밀하게 준비하되 굴하지 말고, 지속가능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평화의 담대한 ‘문’을 여는 ‘문’재인 정부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국제정치>

 

Posted by KHross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대화가 복원됐지만 한반도의 평화는 북·미 협상이 최종 보증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올 들어 남북대화를 지지하고 북·미 대화에도 전향적인 듯하지만 낙관은 금물이다. 미국은 지난 25년간 북핵협상 실패의 책임을 북한으로 돌린다. 북한이 최근 몇 년간 핵능력 고도화에 집착하면서 국제사회도 이런 인식이 굳어졌다.

 

북핵사태의 가장 큰 책임은 물론 북한에 있다. 하지만 지난 25년을 돌이켜보면 과연 북한에만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게 하는 장면들이 적지 않다. 적어도 북한의 1차 핵실험이 있던 2006년 이전만 놓고 본다면 미국의 책임이 크다. 이 시기에 ‘제네바 합의’와 ‘9·19 합의’ 같은 북핵해법의 ‘완결판’이 등장했지만 그때마다 신뢰를 깨면서 파국을 유발한 건 미국 쪽이었다.

 

북한과 미국 간의 핵대화는 1988년 미국의 정찰위성이 북한 영변 원자로 부근에 건설 중인 재처리 시설을 확인하면서 시작됐다. 핵무기 제조를 서두를 것이라는 관측과 달리 북한은 1991년부터 3년간 핵 재처리를 중단했고, 핵원료량과 핵시설 리스트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요구수준 이상으로 제출했다. 핵문제를 북·미협상의 지렛대로 쓰기 위해서였다. 이 기간 중 김용순 노동당 국제비서는 미국에 “미군이 통일 후에도 한반도에 주둔할 수 있다”며 관계 정상화를 제안했다.

 

미국은 제의를 수용하는 대신 IAEA의 특별사찰 수용을 요구하며 압박했다.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으로 맞서면서 긴장이 고조되자 북·미 간 협상의 문이 열렸다. 1993년 말 고위급회담에서 미국이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하고, 북한은 핵사찰을 수용하는 ‘동시행동’에 합의했지만 미국은 얼마 안 가 ‘사찰이 완료돼야 훈련을 중단한다’고 말을 바꿨다. 이에 북한은 1994년 5월 영변 원자로에서 핵연료봉을 반출하는 ‘벼랑 끝 전술’로 대응했다. 극대화된 위기는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가 6월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만나면서 진정됐고, 그해 10월 북한 핵동결과 북·미관계 정상화를 맞바꾸는 북핵해법의 마그나카르타(대헌장) ‘제네바 합의’가 체결됐다. 뉴욕타임스 논설위원을 지낸 한반도 전문가 레온 시걸이 북핵 초기국면을 지켜보면서 내린 평가는 눈여겨볼 만하다. “(미 행정부의 다수가) 북한의 폭탄제조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강압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북한은 강압정책이 시행되지 않을 때만 핵무장을 포기하는 조치를 취했다.”(저서 <미국은 협력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일성 사후 북한붕괴론이 유포되자 미국은 합의 이행에 늑장을 부렸다. 빌 클린턴 행정부의 뒤를 이은 조지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악의 축’이라 부르고, 북한이 ‘고농축우라늄(HEU)’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제네바 합의를 파국으로 몰고 갔다. 이후 북핵문제는 ‘6자 회담’ 테이블로 옮겨갔고, 2년여간의 협상 끝에 2005년 9월19일 북한의 핵포기 및 북·미관계 정상화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합의 직후 미국 재무부가 북한의 달러위조 증거를 찾는다며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의 북한계좌를 동결하면서 합의는 잉크도 마르기 전에 좌초했고, 북한은 1년 뒤 핵실험을 강행한다.

 

1차 핵실험을 분석한 결과 핵폭탄 재료는 고농축우라늄이 아닌 플루토늄이었다. 제네바 합의가 파기되자 동결된 원자로를 다시 돌려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농축우라늄 핵개발’ 주장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달러위조 의혹도 1년 넘게 증거를 찾지 못하자 미국은 북한 자금을 돌려줬다. 미국의 불충분한 의혹제기가 한반도 평화정착의 금쪽같은 기회를 두 번이나 날려버렸다.

 

핵실험을 분수령으로 북핵사태는 더 복잡해졌다. 이번엔 북한이 신뢰를 깼고, 한국 보수정권도 걸림돌이 됐다. 북·미 평화협정과 비핵화를 맞바꾸자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 초기의 구상은 이명박 정부의 반대로 좌절됐고, 북한은 2012년 2·29 합의를 얼마 안 가 깨버렸다. 이후 오바마는 북핵을 방관했다.

 

김정은 시대의 북한은 핵무력에 더 집착하고 있다. 트럼프의 미국도 북한에 불신이 커 접점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핵과 안전보장을 맞바꾸는 북핵해법의 기본틀은 25년 전과 동일하다.

 

북·미 협상에서 동맹국이자 당사국인 한국의 입장과 역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한국 여론도 협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대북 유화정책이 핵능력을 키웠다’는 팩트 없는 담론이 여전히 횡행하는 것은 유감스럽다. 북핵을 감싸고 있는 오해의 껍질을 벗겨내기 위해 ‘팩트체크’를 제대로 해봐야 할 시점이 됐다.

 

<서의동 논설위원>

 

Posted by KHross

일본 아베 총리는 무술년 신년사에서 “자위대 위헌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우리들 세대의 책임”이라면서 강력한 개헌 의지를 드러냈다. 아베 총리의 가장 큰 목표는 헌법 9조를 개정하여 ‘전쟁가능 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여당인 자민당은 1월22일 정기국회에서 개헌안을 공개하고, 늦어도 올해 가을 임시국회에서 발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일본의 역사를 살펴보면, 자국의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웃 국가인 우리나라를 공격한 사례가 다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 침공계획, 임진왜란, 정한론, 관동대지진 조선인 6000명 대학살, 버블경제 붕괴 이후의 혐한 등이 그 예이다.

 

 

일본은 신자유주의에 기초한 글로벌화 노선에의 반발로 우경화의 길을 계속해서 걸어오고 있다. 글로벌화가 진전되면서 국민 의식이나 애국심, 국민 상호 연대의식, 자국 언어, 국민문화 등 국가적인 것이 희박해졌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헌법 9조를 개정하는 것 또한 국가적인 것을 강화하기 위한 행보이며, 우경화 가속페달을 밟는 것이다.

 

일본 자국 내 경제 정체 현상을 글로벌리즘 탓으로 돌리면서 재일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었으며, 재일 외국인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인에 대해 싫어하는 감정이 집중화되었다. 그 이후 1991년 8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이 이슈화되면서 1992년 3월 일본 최대 유력 종합월간지인 ‘문예춘추’에 특집대담 기사가 실리게 되고, 이것을 계기로 언론에 혐한 담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본의 헌법 개정을 통한 우경화 행보는 앞으로 일본이 더욱더 국내적인 것, 국가적인 것에 집중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나친 우경화 행보는 자국 이외의 것을 배척하는 양상으로 이어질 것이며, 한·일관계에서는 혐한으로 이어질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노윤선 | 고려대 인문역량강화사업단>

 

Posted by KHross

중국에서 대기 줄이 가장 긴 식당 중 하나가 쥐치(局氣)다. 베이징에만 17개 분점이 있는데 입구마다 대기자용 의자가 수십개씩 놓여 있다. 한두 시간 대기는 기본이고, 사람이 너무 많아 두세 번씩 허탕 쳤다는 이들도 수두룩하다. 이 식당은 옛 베이징거리를 재현한 인테리어와 전통 복장을 입은 종업원 등 복고풍 콘셉트를 내세웠다. 솔직히 음식이 대단히 맛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 손님을 당기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인기 메뉴인 흑미 볶음밥은 연탄 모양으로 그릇에 담겨 서빙된다. 중국 전통 의상인 탕좡을 입은 종업원은 연탄 모양의 볶음밥에 식용 알코올을 뿌려 불쇼를 펼친다. ‘인증 샷’을 찍을지 여부까지 체크해 쇼 구성을 달리한다. 불쇼가 포함된 이 볶음밥의 가격은 5000원 정도다.

 

탕청샤오추(湯城小廚)는 5000~8000원짜리 탕 요리를 파는 중저가 식당이다. 조미료를 넣지 않고 4시간 이상 끓여 재료 본연의 맛에 충실한 탕을 내놓는다. 대추 오골계탕 같은 보양식이 주 메뉴지만 깔끔한 분위기 때문에 20대 고객들이 몰린다. 음식에는 소금을 전혀 넣지 않는다. 대신 테이블마다 놓여 있는 소금통에 ‘1~2회 누르면 싱겁게’ ‘3~4회는 보통’ 등 세심한 설명을 붙여놓았다.

 

딤섬으로 유명한 진딩쉬엔(金鼎軒)은 흰색과 검은색 젓가락, 두 벌씩 준다. 하나는 음식을 개인 접시로 덜어올 때 쓰고, 다른 하나는 음식을 먹을 때 쓰라는 배려다. 이 식당은 24시간 내내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중국식당들이 무섭게 발전하고 있다. 맛, 위생, 분위기는 기본이고 세심한 서비스와 다양한 메뉴, 엔터테인먼트적 요소까지 갖췄다. 고급식당이 아니라 1만원 미만의 음식을 파는 중저가 식당들까지 이런 요소를 두루 갖추고 고객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급속도로 발전하는 정보기술(IT)까지 더해졌다. 테이블에 붙어 있는 QR코드를 스캔하고 간단한 인증 절차를 거치면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주문, 결제가 가능하다. 대기표 아래 인쇄된 QR코드를 인식하면 스마트폰에 대기인수와 예상 소요시간이 표시되고, 차례가 되면 문자로 통지된다.

 

지난해 중국의 요식업 매출액은 4조위안(약 661조원)을 넘어섰다. 빠르게 규모가 커지고 있는데 한식당들은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 1992년 한·중 수교 전후로 하나둘씩 들어선 한식당은 교민과 유학생이 증가하고 드라마 <대장금>이 큰 인기를 끌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2008년에는 베이징에 있는 한식당이 200개에 달했다. 현재 베이징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국식당은 60여곳이다.

 

한식당들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깨끗하고 친절하다. 그때만 해도 중국인들은 한식당의 세련된 인테리어와 서비스 수준을 신기해했지만 이제는 더 나은 서비스를 보여주는 중국식당들이 넘쳐난다. 한식당의 메뉴판은 그때나 지금이나 거의 변화가 없다. 중국식당이 신세대의 입맛과 생활수준 변화에 따라 발전을 거듭하는 동안 한식당은 제자리에 머물렀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이후 임대료와 임금이 급격히 오르고 관련 법규가 까다로워지는 상황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직원 고용 조건이 까다로워지고, 한식당에서 주로 사용하는 숯불이나 휴대용 가스레인지 규정, 오염물 배출 규정이 강화되는 흐름에서 버티지 못했다. 초기 투자 비중이 1.5배 이상 높아지는데 신규 투자는 어려워지면서 중국인 동업자에게 팔거나 사업을 접었다. 한식당은 지금 위기다.

 

그러나 아예 기회를 놓친 것은 아니다. 한국음식을 즐기는 중국인은 여전히 많다. 커져가는 중국 외식 산업에서 한식당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


<베이징 | 박은경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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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던 프로그래머의 자살  (0) 2017.09.27
Posted by KHross

인류의 역사는 크고 작은 위험과 재앙으로 점철된 기록자체라고 볼 수 있다. 평안하고 안전한 삶을 누리려는 본래적인 욕망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늘 시달려 왔는데 그중에도 전쟁은 인간 스스로가 초래한 가장 참혹한 재난이었다. 이 시각에도 이러한 재난은 시리아를 비롯한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고 그 끝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최근에는 외국언론에 한반도의 전쟁위기를 다루는 기사나 논평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런 까닭에 평소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가진 동료나 친지들도 한반도에 정말 전쟁이 재발할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서 나에게 묻는다. 어떻든 걱정스러운 상황이기에 나는 국내와 해외언론의 동향을 더 열심히 챙겨 보게 된다. 한반도의 전쟁위기에 대해 국내와 해외의 일반적 평가나 반응이 서로 조금 엇갈리고 있는데, 해외에서는 국내보다 위기상황을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전쟁위험과는 거리가 먼 서울시민의 일상적인 생활과 반대로 전쟁위험이 크다고 보는 서방 측 언론은 위험에 대한 서로 다른 판단기준을 보여주고 있다. 전자는 호랑이가 아직 우리 안에 갇혀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후자는 호랑이가 이미 우리에서 빠져나와 마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전쟁위험이 아예 없다거나 아니면 작다거나 또는 상당히 크다고 여기는 판단기준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위험을 사회심리학에서는 우선 사회성원 사이에 퍼진 공포감, 불확실성과 무지에 근거한 집단적 반응으로 본다. 구성주의적 갈등이론도 권위를 행사하는 언론, 학계, 정치와 경제엘리트 등이 어떤 사태를 위험으로 규정하고 소통을 통해 이를 정치화하는 행위에 주목한다. 모두 다 위험의 주관성을 강조한다. 가령 심장병환자의 위중 정도나 기업경영에 나타나는 위험 정도를 상당히 객관화시켜 볼 수 있는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위험(risk)은 큰 암석이 굴러떨어질 수도 있는 바닷가에 있는 절벽(rhiza) 밑을 항해하는 배의 위기적 상황을 묘사하는 고대그리스어로부터 유래하고, 위험(危險)의 위(危)자도 원래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 서 있는 사람과 그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을 형상화하였다. 두 단어 모두 완결되지 못한, 극도로 불안정한 정황을 묘사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호랑이가 우리 속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나 호랑이가 이미 밖에 나와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판단도 위험이 지니고 있는 미완의 긴장성을 지나치고 있다. 위험을 단순히 안전에 대한 반대개념으로 여기고 있기에 이의 부재에만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험을 우리 삶의 불가피한 요소라고 본다면 차라리 호랑이를 가두어 둔 우리가 정말 튼튼한지에 대하여 먼저 관심을 돌려야 한다. 그럴 때 평화학자 요한 갈퉁의 주장처럼 단순히 전쟁이 없다는 의미로서 이해되는 ‘부정적인’ 평화는 물론 온전한 평화체제를 적극적으로 확립하는 ‘긍정적인’ 평화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된다.

 

우리는 ‘위기가 곧 기회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적인 난기류는 자기이해에 따라 과대평가될 수도 있고, 또 과소평가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은 전쟁이었는데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관습화된 믿음과 안이한 태도를 가지고는 위에 지적한 긍정적인 평화는커녕, 부정적인 평화도 기대될 수 없다. “너희들이 삶을 걸지 않으면 너희들의 삶은 얻어질 수 없다”는 독일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의 &lt;발렌슈타인&gt;의 유명한 대사도 위험이 오히려 새로운 자유를 촉발한다는 역설을 지적하고 있다. 일상 속에 안주하려는 무기력하고 지루한 연속을 일시에 혁파하고 부정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강한 긍정이 위기를 기회로 전화시키는 힘이다. 이런 까닭에 위험은 모험이나 결단 또는 운명적인 기회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올해 우리는 한반도에 서로 다른 체제를 가진 두 국가를 세운 지 70년을 맞는다. 냉전시대의 최초의 혈전이 남긴 비극이었던 한국전쟁을 겪은 지도 이미 65년이 지났건만 우리는 여전히 ‘휴전체제’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자기최면에 걸린 안전과 사이비 평화 속에서 살고 있다. 정치사회적인 위기에 직면해서는 4·19의거, 5월 광주항쟁, 6월항쟁 그리고 작년에는 ‘촛불혁명’이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중요한 계기들이 긍적적인 평화는 물론 부정적인 평화로도 이어지지 못했다. 두 번에 걸쳐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었고, 크고 작은 남북의 만남도 있었지만 지속가능한 평화체제를 창출하지 못했다. 이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단체제를 효과적으로 관리해 온 한반도 안팎의 세력이 아주 강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북핵 문제가 촉발시킨 위험은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현상유지에 충격을 주고 새로운 변화를 도출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쇄빙선이 얼음에 갇혀 더 이상 항해를 지속할 수 없을 때는 선체 안에 적재한 많은 물을 좌우로 강하게 흔들어 생길 때 얻어진 힘으로 얼음을 깨고 전진한다. 지금의 위기는 오히려 현상유지라는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충격을 주고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까닭에 위험에 관해 지금까지 타성에 젖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도 당연히 변화가 있어야 한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 속에 집어넣으면 개구리는 죽을힘을 다해 탈출을 시도하지만, 이를 미지근한 물 속에 놓고 점차적으로 수온을 높이면 개구리는 그 속에서 편안하게 죽는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에게는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길목에 있는 성문의 현판에 쓰여진 단어 ‘순간’은 지루한 시간을 이어온 고리를 단번에 끊는 화두였다. 한반도의 위험이 증폭되는 요즘이 바로 그러한 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 사회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사회적 동력은 결코 소진되지 않았다. 촛불혁명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적폐청산이나 민생과 개헌 문제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의 삶을 옥죄어 왔던 근본 문제를 잊지 말아야 한다. 평화체제의 결손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촛불혁명이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는 힘있는 계기로 승화되는 소식을 그래서 더욱더 기대하게 된다.

 

<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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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남북 고위급회담 때 단체로 남한에 온 북한식당 여종업원의 송환 문제를 이산가족 상봉행사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도 15일 “북측이 기존 입장을 저희에게 다시 얘기하는 정도”였다며 확인했다. 2016년 4월 20대 총선을 불과 닷새 앞두고 공개된 ‘북한식당 여종업원 집단탈출’만큼 의혹투성이인 사건도 드물다. 중국 저장성 닝보에 있는 북한식당 ‘류경’의 여종업원 12명과 남성 지배인 1명 등 13명은 2016년 4월5일 돌연 식당을 벗어나 상하이 푸둥공항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상하이를 떠나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를 거쳐 이틀 만에 인천공항으로 입국했다. 하루 뒤인 4월8일 통일부 대변인이 긴급 브리핑을 통해 여종업원들의 입국 사실을 공개했다.

 

21일 오후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채희준(오른쪽), 천낙붕 변호사(왼쪽)가 법정에 들어서기 앞서 북한 식당 종업원 12명에 대한 인신보호법상 구제 청구와 관련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입국 직후부터 숱한 의문이 제기됐다. 우선 탈북민의 제3국 경유 입국이 한 달 넘게 걸리는 점에 비춰 단 이틀 만에 입국함으로써 국가정보원의 간여를 짐작하게 했다. 정부가 사진까지 공개하며 입국 사실을 발표한 것도 고위급 인사가 아닌 한 신분과 탈북경로를 공개하지 않는 원칙에 어긋난다. 이런 의혹은 총선 승리를 위한 ‘북풍공작’이라는 의심을 키웠다. 입국 이후의 행적도 의문투성이다. 여종업원들은 정보당국의 특별관리를 받으며 사회와 격리돼 왔다. ‘오마이뉴스’ 보도에 따르면 통일부 당국자는 지난해 7월 민변 변호사들과의 면담에서 “여종업원들은 국정원의 특별보호대상”이라고 밝혔다. 국정원의 특별보호대상은 ‘국가안전보장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 사람’에 한정되는데 여종업원들이 그럴 대상인지 납득하기 힘들다.

 

이 문제는 이산가족 상봉행사는 물론 남북관계에도 걸림돌이 될 우려가 크다. 여종업원 중 일부는 강제로 입국했다는 관측도 있다. 지난해 한국을 방문했던 토마스 오헤아 킨타나 유엔인권보고관은 지난해 10월 유엔총회 제3위원회에 출석해 “일부 종업원은 집단탈출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진술이 있었다”는 보고서를 제출한 바 있다. 만약 사실이라면 강요에 의해 원치 않는 탈북을 함으로써 가족과 생이별한, 새로운 이산가족이 됐다는 뜻이다.

 

정부는 진상을 철저히 조사해 한 치의 의혹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 이산가족 상봉행사 및 남북관계의 복원을 위해서는 물론 단 한 사람의 인권도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보편적 인권 규범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문재인 정부는 파장이 워낙 커 다루지 않는 듯하지만 언제까지나 덮어둘 수는 없는 문제다. 여종업원들 모두 자기 뜻으로 탈북했는지, 자의에 반하는데도 왔는지 확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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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은 그제 열린 남북 고위급회담을 계기로 10년 가까운 단절의 시대를 끝내고 교류와 협력의 시대로 재진입했다. 이를 북핵 측면에서 본다면 문재인 정부가 북핵 게임의 새로운 주도자로 등장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정부는 남북관계 개선과 함께 북핵 문제도 해결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10일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북핵 문제가 해결돼야 남북관계가 개선될 수 있고, 남북관계가 개선돼야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북관계 발전과 북핵 해결을 연계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위급회담에서 북측은 남북 사이에 북핵 문제도 논의해야 한다는 남측의 입장에 대해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핵보유국으로서 비핵화협상에는 응하지 않으며, 핵·미사일 문제는 북·미 간 현안으로 남한과는 논의하지 않는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다. 남북대화가 남북관계 개선을 넘어 비핵화 대화로 발전하려면 특단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비핵화 성과에 대한 조급증이 불거질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남북대화가 재개되자 시민 사이에서 비핵화에 대한 때 이른 기대감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국내 냉전적 보수세력은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비핵화에 기여하지 못하는 남북대화는 소용이 없다며 대화무용론을 주장하고 있다. 보수세력은 나아가 남북대화 자체에 대해서도 “북한의 위장 평화공세에 말려 북핵 완성 시간을 벌어주는 정치쇼”라고 깎아내리고 있다. 

 

비핵화는 긴 여정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남북한과 미국의 핵심 이익이 걸린 복잡한 사안을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는 없다. 더구나 남북대화는 이제 막 첫발을 뗐을 뿐이다. 남북대화를 둘러싼 국내외 환경이 호의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남북대화를 100% 지지한다”고 말했지만 미국은 신중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남북대화가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 부정적인 태도로 선회할 가능성이 크다.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다. 남북대화가 북·미 대화로 발전하고, 비핵화 단계로 진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핵 동결이라는 중간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물론 동결이라는 목표도 결코 달성하기 쉬운 과제는 아니다. 이런 현실에서 당장 비핵화가 가시적이지 않다고 남북대화에 회의적 시선을 보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지금은 남북대화와 교류를 확대하고 신뢰를 쌓는 것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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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미국 정가의 뜨거운 화제는 마이클 울프의 신간 <화염과 분노>다. 주변 인물들 인터뷰를 통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전후를 생생하게 담았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대목은 트럼프 캠프의 누구도 그가 미국의 대통령이 될 것이란 생각을 못했다는 점이다.

 

“대선 당일 저녁 8시를 넘기고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예상 밖의 전망이 확정적으로 보일 때였다. 트럼프의 아들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아버지가 무슨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라고 말했다. 멜라니아는 눈물을 흘렸다. 기쁨의 눈물이 아니었다.” 대선 승리 소식에 트럼프와 부인 멜라니아가 놀라는 대목이다. 유명해지고 싶었던 트럼프는 대선 일주일 전에 친구인 로저 에일스 전 폭스뉴스 사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꿈꿔왔던 것보다 더 강력하다. 져도 진 것이 아니다. 이만큼만 해도 우리가 이긴 것이다.”

 

트럼프는 준비된 대통령이 아니다. 트럼프 측은 “쓰레기 저자”의 “기괴한 소설”이라고 부정하지만 책의 내용은 신빙성이 높다. 실제 대선 당일 필자가 확인한 뉴욕 힐튼미드타운호텔에 마련된 트럼프 캠프의 분위기는 승리의 기대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캠프가 제이콥자비츠 컨벤션센터에서 대대적 승리 이벤트를 준비한 것과 너무나 대조됐다. 트럼프의 오랜 친구 크리스 루디 뉴스맥스 사장은 최근 CNN 인터뷰에서 트럼프를 “어쩌다 대통령(accidental president)”이라 불렀다. 루디는 “그 말이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어쩌다가 대통령이 됐다. 우연한 상황의 연속이 그렇게 이끌었다”고 말했다.

 

트럼프 정부의 초반 1년이 왜 그렇게 혼란스러웠는지를 알 만하다. 대선에서 유명해지면 그만이었으니 집권 이후 구상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길 생각이 없었으니 욕을 먹더라도 세금 내역을 공개할 이유는 없었다. 대선 승리 후 트럼프에게 기성 정치권이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지, 그가 얼마나 큰 자신감을 갖게 됐을지도 상상할 수 있다. 자신을 반대해온 공화당 주류가 발아래로 보이고, 포퓰리즘의 힘을 한껏 느꼈을 것이다. 줄곧 클린턴이 이긴다고 떠들던 주류 언론이 민심과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을 것이다. ‘가짜뉴스’ 공격에 자신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미국에는 유명한 ‘어쩌다 대통령’이 또 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이 된 후 1945년 취임 4개월 만에 루스벨트가 사망하자 대통령직을 승계한 해리 S 트루먼이다. A J 베임이 지난해에 출간한 <어쩌다 대통령: 해리 S. 트루먼과 세계를 바꾼 4개월>에 따르면 당시 한 백악관 출입기자는 트루먼을 “마치 길거리에서 무작위로 뽑힌 것처럼 백악관에 들어온 남자”라고 묘사했다. 한반도 전쟁 위협, 핵전쟁 이야기도 두 사람의 겹치는 부분이다. 일본 원자폭탄 투하, 6·25 전쟁 파병이 트루먼 재임 시 이뤄졌다.

 

운으로 시작했다고 훌륭한 대통령이 못될 이유는 없다. 트루먼은 승계한 대통령직을 마친 후 재선에도 성공했고, 미국이 주도하는 전후 세계질서의 기틀을 다졌다.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이들이 모두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라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임기도 못 채우고 쫓겨났다. 다만 트럼프에게서는 성공 가능성을 찾기 어렵다는 게 비극이다. 트루먼은 취임 5개월 만에 지지율 87%를 찍었지만 트럼프는 1년이 지난 현재 정신건강 의혹까지 제기되며 30%대의 역대 최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다. 선거 캠페인과 통치는 다른 영역이고, 유명인과 훌륭한 정치인은 겹치는 게 아니며, 리얼리티쇼와 대통령직 수행은 달라야 한다는 게 증명됐다.

 

1년 만에 미국 사회에서는 반지성이 횡행하고, 가진 자들의 탐욕은 노골화하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은 ‘위대한 미국’의 시작이 아니라 미국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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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대북게임이 시작되었다. 운전석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위원장이 앉았다. 운전자는 바뀌었어도 북·미대화로 가는 차로는 그대로다. 남북대화 현실화에 혼란스러워하던 트럼프도 이내 그것을 깨달았다. “두고보자”던 유보적 태도에서 이틀 뒤 “100% 지지한다”고 돌아선 것은 특유의 손익개념이 발동한 것이다. 과연 트럼프 ‘스럽다.’

 

사실 트럼프로서는 손해볼 게 없다. 어차피 북·미는 꽉 막혀 있다. 남북대화가 잘되면 북·미대화로 연결되지만 잘 안될 경우 책임은 대부분 문 대통령이 진다. 더구나 문 대통령은 남북대화 성사가 트럼프의 공로라며 한껏 체면을 세워주었다. 그걸 자랑하지 않을 트럼프가 아니다. 즉각 트윗에 “내가 확고하고, 강력하고, 북한에 대해 모든 ‘힘’을 쓸 의지를 보이지 않았더라면 지금 남북대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겠느냐?”는 글을 올렸다. 불과 몇 주일 전만 해도 남북대화에 냉소적이던 그 트럼프가 맞나 싶지만 이게 트럼프다.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남북 고위급 회담은 남북의 운명이 걸린 중대하고 소중한 기회이다. 항간에서 회자되는 마지막 기회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지만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회담인 건 맞다. 회담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면 문 대통령은 운전석에서 내려와야 한다. 남북은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잃은 채 강대국들의 손에 미래를 맡기는 신세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변덕스러운 트럼프는 남북대화를 지지하고 힘을 실어준 유용한 존재에서 언제 다시 한반도 평화를 흔드는 위험한 인물로 표변할지 모른다.

 

한·미동맹과 남북관계는 반비례 관계에 있다.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동맹은 약화되고 그 반대면 강화되는 식이다. 이것이 나쁜 이유는 정치 선동과 음모의 논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남북관계 개선 시도를 동맹 이간책으로 몰아가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수용돼 여론화되는 것이다. 이번 남북대화 성사 과정에서도 이런 병폐가 나타났다.

 

이 때문에 문재인 정부는 회담 성사에 많은 것을 걸어야 했다. 미국의 의심을 감수하면서 ‘3불 정책’과 한반도 전쟁 반대, 한·미군사훈련 연기를 주장했다. 한반도 긴장완화와 북한의 의구심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지만 미국의 전략과는 배치되는 사안들이다. 하위 동맹인 한국으로서는 모험에 가까운 시도였다. 문 대통령 개인도 대가를 치렀다. 근육 자랑을 하는 북한과 미국 사이에 끼인 채 미국으로부터는 추종을 강요당하고, 북한으로부터 냉대당하면서 진정성 하나로 버텨냈다. ‘항우의 가랑이 밑을 긴 한신’으로 비유되기까지 했다. 만에 하나 고위급 회담의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을 경우 이 모든 것은 허사가 돼 버릴 것이다. 남북대화는 김 위원장의 신년사가 직접적 계기가 되었지만 그 이전에 문재인 정부의 회담 환경 조성 노력이 없었다면 성사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물론 남북 고위급 회담은 일정한 성과를 담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평창 올림픽 참가를 시사하고 한반도 평화와 다방면의 남북 접촉·왕래를 장담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회담을 수락하는 전통문에서 “남북관계 개선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불안한 구석도 많다. 예컨대 김 위원장이 거론한 ‘조선반도의 평화적 환경과 첨예한 군사적 긴장상태’가 ‘한·미군사훈련과 미국의 전략무기 한반도 전개 영구 중단’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의구심이 존재한다.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해 필요한 조치들이지만 당장 시행할 환경은 전혀 조성돼 있지 않다. 북측이 이를 남측에 수용하라고 강하게 요구할 경우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김 위원장은 패를 쥔 것은 자신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남북대화는 북한의 에어포켓이나 다름없다. 고립된 북한이 국제사회와 연결된 유일한 출입문이자 생존공간이기 때문이다. 남북 고위급 회담은 남측보다 북측에 훨씬 더 소중하다. 남북대화에서 패를 쥔 쪽이 유리하고 반대쪽은 불리하다고 여기는 발상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다. 대북 게임의 운전석에 앉은 것은 문 대통령만이 아니다. 운전을 잘못하면 김 위원장은 트럼프와 만나야 한다. 더 위험하고 험난할 것이다. 김 위원장은 모든 것을 걸고 핵개발을 해왔지만 이번 회담에도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남북은 2000년대 초반 10년 동안 남북화해·협력의 길을 함께 걸었다. 당시 김대중·노무현-김정일 그룹은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한 대로를 닦는 노력을 기울였다. 문재인-김정은 그룹도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김 위원장으로서는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족적을 따라가면 되는 일이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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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핵무기는 보유만 하면 적에 대한 억지력이 확보되는 것으로 여겨졌다. 선제공격을 당한 쪽이 무조건 지는 게임이었다. 그러나 핵무기와 미사일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런 개념이 깨졌다. 일단 상대의 공격을 견뎌낸 후 응징 보복할 수 있느냐가 관건으로 등장했다. 중국의 핵전략인‘장성(長城)전략’도 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핵 공격 능력은 최소화한 채 1차 핵공격을 감내하고 나서 2차 반격에 집중하는 것이다. 여기서 지휘부와 핵무기를 쏘아올릴 미사일을 1차 공격에서 온전히 보존하는 게 필수가 되었다.

 

핵 전쟁 시 미국 지휘부가 머물러 ‘지하 펜타곤’으로 불리는 미 펜실베이니아주 레이븐록 지하 벙커의 입구

 

지하 벙커가 등장한 이유다. 최근 유사시 중국의 지도부가 대피하는 지하 핵시설이 공개됐다. 지하 벙커는 지도부들이 집단 거주하는 베이징 중난하이에서 북서쪽으로 20㎞ 떨어진 시산(西山) 국립공원 내 지하 2㎞ 깊이에 있다. 이 벙커의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화제가 됐다. 자그마치 100만명 이상에게 식수를 공급할 수 있다. 왠만한 도시 하나가 벙커로 들어가는 것이다. 중국은 지난해 5월 소림사가 있는 쑹산 일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설과 반격훈련 장면을 공개한 바 있다. 당시 중국 CCTV는 중국군이 이곳에서 한달동안 밀폐된 채 2차 반격 훈련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곳 역시 지하 1㎞ 깊이에 총 길이가 5000여㎞에 달해 ‘지하 만리장성’으로 불린다. 중국의 핵전략 중 방어와 공격을 수행하는 두 핵심시설이 공개된 셈이다.

세계 최강의 핵무기 국가인 미국도 비슷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핵전쟁에 대비해 수도인 워싱턴 DC인 펜실베이니아주 레이븐록산과 버지니아주 웨더산 지하에 지휘벙커를, 콜로라도주 샤이엔산에 미사일 시설을 두고 있다.‘지하 펜타곤’으로 불리는 레이븐록 벙커는 워싱턴 DC 북서쪽에 있는 대통령 별장 캠프 데이비드에 인접해 있다. 백악관에서 캠프 데이비드까지는 약 100㎞, 웨더 벙커까지는 70여㎞ 떨어져 있는데 유사시 대통령은 이 둘 중 한 곳으로 가 전쟁을 지휘하게 된다. 지난 2001년 9·11 공격이 벌어졌을 때 딕 체니 부통령은 백악관 벙커에서 상황을 보다 하원의장과 장관들에게 헬기 편으로 웨더 벙커로 가라고 지시했다. 웨더 벙커를 전쟁 지휘소로 선택한 것이다.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은 플로리다에 있었다.) 만약 당시 부시 대통령이나 체니 부통령이 캠프 데이비드에 있었다면 레이븐록으로 갔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미국에서 핵 벙커 설치를 주도하는 것은 기업과 민간인들이다. 핵 전쟁이 나면 정부가 주요 인사와 필수 인원만 벙커로 데려가 보호하기 때문에 돈 많은 사람들이 앞다퉈 개인 벙커를 마련하고 있다. 할리우드 스타 톰 크루즈와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 등 저명인사들까지 저택 지하에 벙커를 설치하고 있다. 최근 북한의 핵 위협이 고조되면서 한 업체는 매출액이 5배까지 늘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도 민간 벙커 설치가 유행했다.

 

레이븐록 벙커의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필수 기능만 갖춘 것에서 호화판까지 벙커도 각양각색이다. 창사 36년만에 최고 매출을 기록한 LA의‘아틀라스 서바이벌 셸터스’는 2만(약 2200만원)∼16만5천달러(1억8천만원)짜리 벙커를 제작하고 있다. 태양광 패널로 전기를 확보하고, 저장고에 음식과 물을 챙겨놔 6개월에서 1년간 생활이 가능하다. 캔자스주에는 미사일 격납고를 개조한 콘도형 벙커가 있는데, 지하 15층에 각 층이 50평 넓이로 침실과 거실, 주방, 화장실 등을 갖추고 있다. 헬스장은 물론 영화관과 수영장, 스파에 심지어 무기고까지 있다. 채소를 가꿀 비닐하우스도 있어 75명 전체 입주민이 5년 남짓 생활할 수 있다. 한 개 층 가격이 400만달러(44억원)다. 최근엔 5성급 호텔과 맞먹는 초호화판 벙커까지 나왔다. 한 채 분양가가 1750만달러(약 190억원)에 이른다고 하니 어떤 시설을 갖췄는지 상상하기도 쉽지 않다.

 

미 조지아주에서 분양되고 있는 5성 호텔급 초호화 지하벙커. 한 채 분양가가 190억원으로 제시됐다


미·소 냉전이 종식된 후 핵무기 무용론이 득세했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소련 대신 중국이 부상해 미·중 갈등이 고조되고, 북한의 핵개발이 겹치면서 다시 핵 대결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김정은을 향해 자기 핵 단추가 더 크다고 자랑할 즈음 중국이 대규모 벙커를 공개하자 냉전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유사시 벙커에 들어갈 중국인 100만명과 미국의 부유한 시민 수십만명은 전체 인구의 0.1%에 해당한다. 이들만 벙커에서 생존한다면 핵 전쟁에서 이겨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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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군 행보가 심상찮다. 새해 벽두부터 군복을 입었다. 지난 3일 ‘2018년 군 동원훈련 대회’가 열린 허베이성 중부전구 훈련장에 참석해 훈련 명령을 내렸다. 시 주석은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과 싸워 이겨야 한다”고 말했다. 신화통신은 주석이 직접 훈련 동원 명령을 내린 건 처음이라고 전했다. 메시지가 있는 행보란 의미다.

 

다음 일정을 보면 짐작이 간다. 시 주석은 육군부대를 시찰한 자리에서 한국전쟁 당시 송골봉 전투를 언급했다. 이 전투는 1950년 11월30일 중국군 112사단 100여명이 북한 서부 송골봉에서 미군 2사단 7000여명과 사투를 벌였고, 중국군 7명만 살아남아 진지를 지켰다고 중국 전사에 기록돼 있다. 다분히 미국을 의식한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지난해 10월 집권 2기를 출범하며 ‘강군몽’을 선언한 시 주석이 올해 ‘군사 굴기’를 본격화할 뜻을 드러낸 것이다. 앞서 신년사를 발표할 때는 젊은 시절 군복 입은 사진을 뒤편에 놓았다. 사진 자체가 메시지다.

 

중국은 꿈을 꾸고 있다.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강대국이 되겠다는 ‘중국몽’이다. 청나라는 1842년 아편전쟁으로 영국 함대에 무릎을 꿇었다. 난징에 정박 중인 군함 위에서 치욕적이고 불평등한 조약을 맺었다. 그 결과 홍콩을 넘겨줬다. 100여년이 지난 1949년 마오쩌둥은 톈안먼 광장에서 “중화 민족이 일어섰다”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했다. 시 주석은 그로부터 또 100년 뒤인 2050년 ‘위대한 중화 민족의 부흥’을 완성하겠다고 선언했다.

 

내부적으론 거칠 게 없다. 사상도, 당·정부 체제도 그를 중심으로 재편됐다. 도광양회(韜光養晦·드러내지 않고 때를 기다림)에서 분발유위(奮發有爲·떨쳐 일어나 할 일을 함)로, 본격적인 굴기의 시대로 나아가려고 한다. 시 주석이 얘기하는 ‘신시대’는 인류 문명의 중심이었던 그때로, ‘백 투 더 퓨처’ 하겠다는 것이다(<백 투 더 퓨처>는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1985년 만든 영화 제목이다).

 

지금 중국은 미국과 함께 ‘G2’(주요 2개국)로 표현된다. 중국은 2010년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일본을 앞서며 세계 경제 2위에 올랐다. 2017년 국제통화기금(IMF) 집계 기준으로 미국 19조3621억달러, 중국 11조9375억달러다. 군사비 지출도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에 따르면 2016년 미국은 6110억달러, 중국은 2160억달러다. 1·2위 간 격차는 여전히 크다. GDP와 군사비 3위는 각각 일본(4조8844억달러)과 러시아(692억달러)인데 저만치 뒤에 있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한다. 하지만 G2로 같이 묶이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미국은 패권적 지위를 활용해 2인자가 더 커지는 것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실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규모 2인자는 영국에서 독일로, 일본으로, 중국으로 바뀌었다. 미국은 지난 연말 발표한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에서 중국에 대한 공세를 예고했다. 미국의 패권을 위협하는 ‘수정주의 국가’로 규정한 것이다. 힘과 힘이 충돌하는 상황이 될 개연성이 높아졌다.

 

이 판에 러시아도 끼어들 태세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판 ‘중국몽’인 ‘위대한 강대국 러시아의 부활’을 노린다. 미국 일극 체제는 물론, 미·중 G2 시대로 고착화되도록 놔두지 않으려 한다. 러시아 역시 미국과 세계질서를 양분했던, 구소련 붕괴 이전인 그때로, ‘백 투 더 퓨처’ 하려고 한다. 강대국들의 민족주의 주창은 국제 정세의 불확실성을 키운다.

 

중국이 초강대국의 DNA를 펼쳐보겠다는데 지금 미국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후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남이야 뭐라든 뒤집거나 버렸다. 새해맞이 첫 일성도 “2018년 미국을 더욱 위대하게”였다. 올해도 그런 기조는 계속될 것임을 보여준다. 미국의 고립 자처는 국제사회의 리더십 포기로 연결됐다. 중국이 움직일 공간을 넓혔다. 중국은 그런 미국을 향해 ‘인류 공동 운명체’를 강조한다. 민주주의의 구조가 서구와 딴판인 중국이지만 미국의 위상이 예전 같지 못하니 세계가 중국의 언행을 주시한다.

 

미·중의 작용과 반작용, 도전과 응전은 2018년을 달굴 것이다. 그 사이에 놓인 한국이 어떤 영향을 받을지 예단하기 어렵다. 다만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이 고립주의와 보호주의를 부르짖었지만 자유무역과 다자주의는 지켜져야 할 가치라는 점도 확인됐다. 어느 일방의 뜻대로 국제질서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올해도 ‘회복력(resilience)’을 발휘할까. 국립외교원이 2017년을 평가하고, 2018년을 전망하면서 선택한 단어다.

 

<안홍욱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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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6일 캠프 데이비드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공개적이고 명확한 목소리로 남북대화를 지지했다. 트럼프는 남북 고위급 회담을 “큰 시작”이라고 평가한 뒤 “남북이 올림픽을 넘어서 협력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나아가 그는 “적절한 시점에 우리도 (대화에) 관여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직접 통화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틀림없이 그렇게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남북대화에 이보다 더 큰 힘을 실은 수사가 또 있을까 싶다.

 

트럼프의 지지 표명은 실로 의미가 크다. 트럼프는 과거 몇차례 대화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지만 이번처럼 확실하게 북한과의 대화를 지원한 적이 없다. 이번 언급으로 남북대화에 대해 한·미 간 ‘이견 돌출’이나 ‘대북 엇박자’ 주장이 무색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미국이 적절한 시점에 북한과 대화에 참여하고, 자신이 직접 김정은과 대화에 나설 의향이 있다고 밝힌 것은 남북대화가 북핵 대화로 연결될 것이라는 기대감의 발로이자 메시지다. 미국과 중국이 동시에 공개적으로 남북대화에 힘을 실어주는 상황이 모처럼 조성된 것이다.

 

남북은 주말 이틀 동안 회담 대표단 구성을 마무리하는 등 회담 준비를 마쳤다. 남측 수석대표인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최고의 남북대화 전문가이며, 북측의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장 역시 남북 군사실무회담 등을 이끈 대표적인 대남통이다. 회담을 실무적으로 진행할 천해성 통일부 차관과 전종수 조평통 부위원장 또한 남북대화에 정통하다. 회담의 최우선 의제인 평창 올림픽 참가 문제를 다룰 인사들은 해당 분야 실무에 밝은 노태강 문화체육관광부 2차관과 원길우 체육성 부상 등 차관급으로 채워졌다. 북측은 남측이 제시한 명단에 대표단의 급을 맞춰 ‘격 논란’을 불식시켰다. 과거 어느 때보다 중량감 있는 대표단이 꾸려짐으로써 구체적 성과를 기대하게 한다.

 

그만큼 남북대화의 책임성은 더 커졌다. 남북회담이 궁극적으로 북·미 및 북핵 대화로 연결되어야 한다. 트럼프는 북한과 무조건 대화하겠다는 뜻은 아니라고 했고,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도 북·미 대화 가능성에 대해 “결과가 어떨지 좀 기다려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남북 모두 일희일비하지 말고 합의가 가능한 부분부터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한다. 대화 모멘텀을 저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야당을 비롯한 보수세력도 모처럼의 회담이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초당적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9일 회담에서 북측이 내놓을 메시지에 주목한다. 핵·미사일 도발 중단은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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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고 전쟁을 조작하라고?” “아니, 실제 전쟁이 아니라 ‘전쟁 쇼’ 말이야.”

 

재선을 위한 대선을 10여일 앞둔 미국 백악관에 비상이 걸린다. 대통령의 여학생 성추행 사건이다. 언론은 이미 냄새를 맡은 상태다. 상대 후보에 앞서고 있지만 곧 역전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여론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일이다. 백악관은 그 방면의 최고인 스핀닥터를 고용한다. 스핀닥터는 정치홍보전문가를 말한다. 그는 할리우드 유명 제작자와 손잡고 가짜 전쟁을 만들어낸다. ‘전쟁 쇼’는 위력을 발휘한다. 대통령의 성추문 뉴스는 뒷전이고, 대통령은 재선된다.

 

1997년에 제작된 미국 블랙코미디 영화 <왝 더 독(Wag the Dog)> 줄거리다. 영화 제목 ‘왝 더 독’은 개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뜻이다. 주객전도를 의미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위기에 놓인 권력자가 국민의 관심과 여론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연막을 치는 행위를 일컫는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당시 이 영화가 주목을 끈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추문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클린턴의 성추문은 1998년 1월17일 언론에 처음 공개됐다. 영화가 상영된 지 한 달이 채 안된 때다. 클린턴 성추문은 그해 8월 의회 청문회로 이어진다. 바로 그때 영화 <왝 더 독> 같은 일이 벌어졌다. 르윈스키가 청문회에 출석한 이튿날, 클린턴은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알카에다 훈련캠프와 수단의 화학무기 공장에 미사일을 쐈다. 그러나 수단 공장은 화학무기 공장이 아니라 제약 공장이었다. 클린턴도 미리 이 사실을 알았다. 전형적인 ‘왝 더 독’ 전략이 아닐 수 없다. 결과는 끔찍했다. 정치적 위기 돌파를 위해 쏜 미사일 한 방에 수단이 생산하는 의약품 절반이 사라졌다. 클린턴 성추문에 대한 관심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미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 탈출을 구실로 전쟁을 일으킨 사례는 흔하다. 1983년 10월23일 레바논 베이루트 주둔 미 평화유지군 주둔지에서 자살폭탄테러가 일어났다. 사망자만 241명. 2차 세계대전 이후 하루 동안 가장 많은 미군이 희생됐다. 이틀 뒤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은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그레나다를 침공했다. 명분은 옛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에 따른 내전 우려였지만 베이루트 참사에 대한 비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함이었다. 대량살상무기 파괴를 명분 삼은 조지 W 부시의 2003년 이라크 침공도 마찬가지다. 눈엣가시 사담 후세인 제거가 목적이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버락 오바마는 어떤가. 이라크 철군을 했다가 이슬람국가(IS)가 준동하자 오히려 미군을 증강시켰고, 시리아 공습도 시작했다. 역대 미 대통령들은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라고 한 클라우제비츠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 실행자였다.

 

도널드 트럼프도 ‘왝 더 독’ 전략을 선택할까. 취임 1년이 채 안된 트럼프는 ‘러시아게이트’로 최악의 위기에 빠져 있다.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의 칼날은 그를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지지율은 곤두박질치고 있다. 특히 오는 11월 자신은 물론 공화당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위기 돌파를 위해 그가 전임자들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잇따른다. 이언 브레머 유라시아 그룹 대표는 최근 “트럼프가 뮬러 특검의 수사에서 궁지에 몰리면 북한에 대한 압박을 강화해 한반도에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진보 지식인 후안 콜 교수(미시간대)는 “트럼프의 지지율 추락과 북한과 이란에 대한 애매하고도 끔찍한 위협이 결합한다면 ‘왝 더 독’ 시나리오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이미 트럼프는 낮은 단계의 ‘왝 더 독’ 전략을 구사해왔다. 아랍권을 비롯한 전 세계를 뒤집어놓은 예루살렘 수도 이전 선언,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 형성에 활용한 트위터 정치가 그것이다. 관심은 트럼프의 마지막 카드다. 전쟁일까. 대상은 북한일 수도, 이란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제3국일 수도 있다. “화염과 분노”나 “폭풍 전의 고요”처럼 그가 북한을 향해 쏟아부은 말폭탄은 불길한 전조일지 모른다. 트럼프의 북한 공격은 상상조차 싫다. 현실을 감안하면 불가능하다. 하지만 위기를 돌파할 수 있고, 시간을 끌 수만 있다면 트럼프는 불가능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미국인들은 바보가 아니기에 트럼프에게 더 이상 속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라도 해야 하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바람이 빗나가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봐왔다. 그럼에도 두 눈 부릅뜨고 트럼프를 지켜볼 수밖에.

 

<조찬제 국제·기획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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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남북대화에 대해 “로켓맨(김정은)이 지금 한국과의 대화를 처음으로 원한다”며 “아마 이것이 좋은 소식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지켜보자”고 말했다. 환영도, 반대도 아니지만 마뜩잖아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트럼프의 참모들은 관망적인 자세를 넘어 좀 더 분명하게 우려를 표명했다. 새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미국의 대북정책은 변함이 없다”며 “북한의 변화를 위해 최대의 대북압박을 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헤더 나워트 국무부 대변인은 한술 더 떠 “김정은의 대화 진정성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며, 그가 우리와 한국 사이에서 어떤 이간질을 하려고 할지 모른다”고 말했다.      

 

갑자기 성사된 남북대화에 대한 미국의 당혹감을 이해 못할 바 아니다. 여태껏 핵·미사일 위협을 일삼아온 김정은 정권의 대화 공세를 의심 없이 수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북한이 한국에는 대화공세를 펴고 미국에는 핵위협을 가함으로써 두 나라를 이간질하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남북대화는 자칫 궁지에 몰린 김정은 정권에 퇴로를 열어주고, 국제사회의 제재·압박 기조에 균열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올 만한 상황이다. 그러나 북한 문제는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가 중요하다. 문제를 풀어나갈 의지가 강하다면 해결의 기회로 삼으면 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동맹국으로서, 북핵 당사국으로서 미국의 태도는 실망스럽다.

 

이번 남북대화의 1차적 목표는 안전하고 평화적인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다. 하지만 남북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군사적 긴장완화와 이산가족 상봉을 비롯한 각종 경제·사회 교류를 복원하는 회담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남북이 대화 있는 시대로 나아가고 신뢰가 쌓이면 북핵 문제도 진지하게 논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남북 간 협의를 통해 북·미 접근을 주선할 수도 있다. 북한과 미국 두 나라가 풀지 못한 북핵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 남북대화를 미국이 색안경을 끼고 봐야 할 이유는 없다. 

 

남북대화와 제재·압박 기조가 충돌할 것이란 우려가 나오지만 이를 피해 운용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북 제재·압박과 대화를 병행할 경우 오히려 북핵 해결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미국은 냉소적인 태도를 거두고 남북대화를 적극 지원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7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한국의 주도적 역할과 남북대화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지금 바로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 한반도 문제에서 한국의 역할을 존중하고, 힘을 실어주는 것이 한반도 긴장완화와 북핵 해결의 첩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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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9일 판문점에서 고위급 남북 당국 간 회담을 열자고 북측에 제의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신년사를 통해 평창 동계올림픽의 북한 선수단 참가 및 남북대화 의지를 밝힌 지 하루 만이다. 정부가 대화 국면을 주도하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평창 올림픽이 한 달여 남은 상황에서 시간이 매우 촉박하다는 현실을 감안한 결과일 것이다.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는 단순한 체육 행사 참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평화올림픽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는 올림픽 개막식의 남북 동시 입장이나 북한 응원단 문제 등 남북 간 준비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다. 정부가 차관급 회담을 거치는 절차 대신 곧장 장관급 이상의 고위급 회담을 제의한 것도 회담의 시급성과 효율성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남북회담 재개에 대비해 충실히 준비해왔다는 자신감도 내비친 셈이다. 북측 역시 김 위원장이 제의할 정도면 상당한 준비가 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2015년 12월 남북 차관급 회담 이후 2년여 만에 당국 간 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커졌다.

 

한반도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 정착을 위해 남북대화는 필수다. 이것이 바로 남북 모두 대화 단절의 시대를 끝내야 할 이유다. 남북대화는 천안함사건과 연평도 포격으로 2010년 대화가 중단된 이후 간헐적으로 재개됐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사실상 8년 가까이 단절된 상태였다. 대화의 소중함은 대화 없는 시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북한은 핵·미사일 능력을 고도화했고, 이로 인해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고 급기야 한반도 전체가 전쟁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대화는 최소한의 한반도 위기관리를 위해서라도 필요하다.

 

물론 지금 대화 환경은 썩 좋지 않다. 미국 등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압박이 압도하는 상황에서 자칫 남북대화가 고립될 수 있다. 만에 하나 남북대화와 제재가 부딪치지 않도록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우선 남북대화를 남북관계 전반의 회복으로 확산되도록 해야 한다. 그다음 남북관계 회복이 북핵·미사일 문제 해결에도 긍정적이라는 인식을 갖도록 남북관계를 지렛대로 북핵 해결책을 제시하고 주도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 운전자’를 자임한 문재인 정부는 대화의 시대를 맞이할 만한 준비가 돼있는지 시험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

 

대화를 위해서는 북한의 협력적 자세가 특히 중요하다. 김 위원장은 신년사에서 “한반도 군사적 긴장 상태 완화와 평화적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향후 남북대화는 김 위원장이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있는지 증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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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 해를 맞으면 ‘기대 반 불안 반’의 심정이 된다. 다가올 1년이 어떨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어서다. 언론에서 신년 기획이나 인터뷰 등을 통해 새해의 과제를 짚고, 어떤 1년이 될지 전망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신문을 비롯해 방송과 주간지 등에선 ‘2018년 일본’을 전망하는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내년 4월 말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퇴위로 ‘헤이세이(平成·현 일왕의 연호)’ 시대가 31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되는 점을 비추어 헤이세이 시대를 되돌아보고 향후 과제를 짚는 ‘헤이세이라는 것은’이라는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다.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2018년 일본 경제 대예측’ 특집을 통해 지난해 2만2900선대까지 올랐던 닛케이 평균주가가 올해 3만선대를 훌쩍 넘어설 것이란 전문가의 예측을 실었다. 일본 경제가 장기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최근 상황이 이 같은 낙관적인 전망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주목할 대목은 향후 일본 경제의 ‘변수’로 북한 핵·미사일 위기, 미국과 중국 등 글로벌 경제 동향과 함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선택’을 드는 전문가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아베 정권이 어떤 정치적 선택을 할지, 그 선택이 어디까지 현실화할지에 따라서 일본 경제, 아니 일본 사회의 향방이 크게 바뀔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일본은 올해 ‘전쟁 가능한 국가’로 나아가는 중대 분기점을 맞을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을 명분으로 전방위적인 무장 강화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전쟁을 포기하고 전력(戰力) 보유를 하지 못하도록 한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속도를 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앞서 아베 총리는 지난해 헌법기념일인 5월3일 ‘전쟁 포기’(1항)와 ‘전력 불보유 및 교전권 비인정’(2항)을 규정한 현행 헌법 9조에 자위대의 근거를 명확히 한 개정 헌법의 2020년 시행을 목표로 제시했다. 집권 자민당도 최근 개헌안의 국회 발의를 연내에 마치고 늦어도 내년 봄까지 국민투표를 거쳐 2020년 새 헌법을 시행한다는 목표를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민당 등 개헌 세력은 현재 중·참의원 모두 개헌안 발의가 가능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고 있다. 다만 개헌에 신중한 연립여당 공명당과 개헌에 반대하는 제1야당 입헌민주당, 그리고 절반 가까운 개헌 반대 여론이 변수다.

 

이런 상황 때문에 아베 총리가 필생의 비원(悲願)인 헌법 개정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둘 경우 국민 분열 등 적지 않은 진통이 불가피해 보인다. 개헌 논의에만 매몰될 경우 모처럼 회복세를 보이는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란 의견까지 나오고 있다.

 

아베 총리는 지난 1일 연두소감(신년사)에서 헌법 개정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날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자위대 논란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작년 중의원 선거에서 대승을 거뒀으니 당연히 당에서 (개헌 논의를) 진행해 줄 것”이라며 개헌 논의에 박차를 가할 뜻을 내비쳤다.

 

공교롭게도 아베 총리는 신년사에서 150년 전 메이지(明治) 유신을 사례로 들면서 ‘국난 극복’을 강조했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으로 평가받지만, 이때 정해진 일본의 행로는 70년 후 군국주의와 전쟁, 그리고 패전으로 이어진다. 보수우익세력들은 일왕을 중심으로 세계에 위세를 떨치던 ‘메이지 일본’으로의 회귀를 꿈꾸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패전 후 73년. 아베 총리는 일본을 ‘전쟁 가능한 국가’로 바꾸려 하고 있다. 그가 꿈꾸는 ‘새로운 국가 만들기’가 어떻게 될지, ‘불안’의 한 해가 시작된다고 느끼는 일본 시민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도쿄 |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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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세제개편안이 지난달 20일(현지시간) 미하원에서 최종 의결되었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틀 만에 이 법안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미국의 법인세 최고세율은 35%에서 21%로 낮추어지게 됐다. 향후 10년간 1조5000억달러에 달할 감세효과는 전체 60% 이상이 소득상위 1%에 귀속된다고 한다. 고소득 그리고 초고소득 계층만을 위한 감세이며 중산층과 저소득계층은 앞으로 더 많은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

 

미국에서 세금문제는 독립시기 보스턴 티파티 이후에도 늘 정치의 최전선에 머물렀다. 닉슨 시기까지 상상하기 어려웠던 복지국가의 축소를 선거승리를 위한 정책의 대안으로 삼은 사람이 레이건이다. 레이건은 스스로를 중산층 납세자들의 옹호자로 포장했다. 유권자들에게 줄어드는 것이 부유한 이들의 세금이 아니라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세금이라고 홍보했고 이 명백한 거짓은 그러나 국가를 개인에 대한 부당한 간섭의 산물로 여기는 미국적인 시각을 매개로 유권자들에게 성공적으로 수용되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7일(현지시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세제개편안을 발표한 뒤 백악관으로 돌아와 기자회견을 갖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트럼프는 이번 세제개편안을 “역사상 최대 감세안”이라고 자평했지만 야당에선 “부자감세”라고 비판했다. 워싱턴 _ AFP연합뉴스

 

감세는 그러나 부산물이 있게 마련이다. 레이건 시기에 미국의 국가부채는 두 배가 되었다. 레이건 감세정책의 가장 슬픈 흔적은 무엇보다 공립학교들이다. 미국에서 가장 수준이 높았던 캘리포니아의 공립학교들은 레이건이 주지사로 재직하며 ‘주민 발의(Proposition) 13’을 통과시키면서 감행한 감세안 이후 교육투자 감소로 가장 낮은 수준의 학교들로 전락했다. 미국의 도로와 교량 등 공공인프라의 수준은 간과하기 어려울 정도로 낙후되었고 저소득층을 위한 보건의료체계는 선진국이라고 보기 어려운 수준이 되었다. 경제의 어려움은 동부에 거주하는 전통적인 중산계층들에게도 전달되었다. 부동산시장에서 그들의 소득으로 지불할 수 있는 주거공간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므누신 재무장관은 트럼프 감세법안이 기업과 가계의 소득을 늘려서 정부의 세수입조차도 늘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 스스로도 자신의 말을 믿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공화당의 일각에서도 이미 감세법안의 여파로 가난한 이들과 나이 든 이들을 위한 메디케어(Medicare)와 메디케이드(Medicaid)를 큰 폭으로 축소시켜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법인세율 인하가 국제적인 트렌드인가? 국제적으로 세율인하의 트렌드는 유럽의 재정위기 이후 멈추었고 지금은 정체단계에 있다. OECD 국가들은 재정위기를 계기로 다국적기업에 대한 과세강화를 과거와 다른 차원의 강도로 시도하고 있다. EU가 최근 우리나라를 조세회피처의 하나로 분류한 것도 크게 보아 그 일환이다. 전 세계적으로 세율인하 추세가 짧은 시간 내에 세율인상 추세로 반전되기는 어려우나 과세행정 강화는 주요 국가들에서 기업에 대한 세수입 증가로 나타날 것이며 장기적으로 세율인하 트렌드 반전의 전 단계라고 보아야 한다.

 

간과하면 안되는 중요한 내용 하나는 미국의 법인세 체계와 우리나라의 그것은 성격이 판이하다는 것이다. 미국기업은 법인세 납부 후 남은 소득의 큰 부분을 주주에게 배당한다. 높은 배당성향은 법적인 강제는 아니지만 자본시장에서의 경쟁을 반영하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 배당된 소득에 대하여 개인소득세로 또 과세된다. 법인에 대하여 낮은 세율을 적용하여도 상당한 부분은 개인소득세에서 국가로 회수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법인에서 낮은 세율로 과세되면 기업의 배당성향도 낮고 배당된 부분에 대한 개인소득세 과세에 있어서도 배당세액공제로 세금을 거의 대부분 공제해주기 때문에 국가로 회수가 매우 작은 부분에 대하여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법인세 인하가 기업의 투자도, 근로자들의 일자리도, 그리고 미래의 세수입도 늘려주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밝혀졌다. 법인세의 투자유인효과, 일자리창출효과, 경제성장효과, 그리고 외국자본유인효과는 실증적 근거가 없다. 많은 투자가 일자리를 대체하는 성격의 투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법인세 감면의 명분은 더 허약해진다. 투자와 일자리를 늘리지도 못하면서 기업의 유보이익만을 증가시키는 법인세 인하는 재정적자를 만들고 필요한 정부지출을 어렵게 하며 소득양극화를 방기하기에 경제의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문제가 크다. 미국이 선택한다는 이유로 지속가능성 측면에서도 결격사유가 명백한 정책대안을 우리가 고려할 수는 없는 것이다. 레이건 시기에 이루어진 미국의 경제사회적 퇴행을 트럼프는 더 가속시키려고 하고 있다. 트럼프의 법안은 수년 내에 철회되거나 그렇지 않다면 가늠하기 어려운 부정적인 흔적을 미국사회에 남길 것이다.

 

<김유찬 | 홍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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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외교에 빨간불이 켜졌다. 중국, 아랍에미리트에 이어 일본과는 위안부 문제 합의 건을 두고 한랭전선이 만들어졌다. 한·일관계가 긴 동면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2년 전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와 관련해 사실상 배후에서 조정자 역할을 했던 미국은 오바마 행정부 때 일이라고는 해도 입장이 난처해졌다. 한·미·일 3자 안보협력은 당분간 기대하기가 어렵게 됐다.

 

문재인 정부에 각을 세운 사람들은 이제 남은 건 한·미동맹 약화뿐이라는 냉소적 반응 일색이다. 중요 정책이 대통령 한 사람의 태도에 결정적으로 좌지우지되었던 상황이 어처구니없기는 해도 실상이 드러난 이상 더는 재발되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돌이켜보면 2017년은 사실상 미국과 북한 간 ‘강대강’ 대치가 최고조에 이른 한 해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작년 한 해에만 무려 4차례의 대북 제재 결의(2356·2371·2375·2397호)를 채택했다. 작년 5월 취임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안보위기를 서둘러 해결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안보불안 지수는 심리적 최고점을 향해 달리고 있다.

 

북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는 지난 25일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2397호)를 단호히 배격한다고 발표했다. 안보리가 22일 만장일치로 채택한 2397호에는 북한이 도발하면 자동적으로 적용되는 ‘트리거 조항’이 들어있다. 북한은 “추종세력들까지 씨도 없이 박멸하자는 것이 우리 군대와 인민의 한결같은 복수의 외침”이라고 겁박했다. 한국과 일본도 핵위협에서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어떡하다 한반도가 비트코인 가치보다 불안정한 처지가 됐다.

 

이제 북한 핵보유는 부정할 수 없다. 미국이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는 없겠지만 언제까지 없다고만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미국이 북한 핵보유를 기정사실화하고 비확산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급선회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한다. 이 문제에 근본적인 대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문재인 정부는 그 어떤 성공적 성과에 상관없이 내파적(內破的) 위험에 다가가는 셈이다. “역사는 한 번은 스스로를 교정할 기회를 준다”는 경구를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대통령과 외교국방 참모들은 북핵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한·미동맹이 상상력의 실타래를 푸는 입구일 수 있다.

 

한·미동맹을 메시아로 여겼던 때가 있었다. 전적으로 동의할 수도 없지만 그 불편한 진실을 쉽사리 부인하기도 어렵다. 누군가가 묻는다. 한국과 미국이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 무슨 일이 남아있는가. 아픈 질문이다. 그 아픔을 문 대통령이 먼저 느꼈다.

 

작년에 대통령은 “우리에게 (현 위기를) 해결할 힘이 있지 않고, 우리에게 합의를 이끌어 낼 힘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주도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한다”고 비감하게 말했다. 국가를 보위할 책임을 진 대통령으로서 적절하지 않은 발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문 대통령은 강대국 정치 중심의 엄혹한 국제 현실에 개입하려고 할 때 상황은 늘 우리가 지니고 있는 힘보다 큼을 말하고자 했다. 지정학적 운명이다.

 

그 운명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한반도가 전장(戰場)이 될 수 있다는 불길한 예측도 있다. 한·미동맹을 축으로 했던 국가안보 패러다임이 이제는 변해야 한다는 요구도 있다. 지도자의 외교적 용기를 필요로 하는 수평적, 쌍방적, 호혜적 관계로의 질적 변화는 불가피하다. 속도와 방향이 관건이다.

 

새해에는 기존의 동맹문법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한반도 문제를 숙의했으면 한다. 이는 북핵이 없던 시절에 만들어진 동맹의 관성에서 벗어나야 함을 말하는 것이지 동맹의 파기를 주장함이 아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미·중관계가 복잡하게 뒤엉킨 전회(轉回)의 시기에 한국 외교국방 주체들의 뼈아픈 각성이 있어야만 관성의 극복도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이병철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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