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이너프 딜’은 왜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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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굿 이너프 딜’은 왜 문제인가

by 경향글로벌칼럼 2019. 4. 19.

미국은 대북 협상을 ‘미국의 방식’으로 주도하기로 작정했다.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보여준 태도는 1년 전 싱가포르 합의에서 나타난 신뢰구축과 관계개선, 평화체제, 비핵화로 이어지는 순차적이고 단계적인 협상에 대한 분명한 거부 의사다. 미국의 방식은 먼저 비핵화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개념을 정리해 놓고 최종단계까지 가는 로드맵을 만든 뒤 그에 따라 행동에 착수하겠다는 것이다. 말로는 싱가포르 합의를 이행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단계적 구조의 싱가포르 합의를 대체할 ‘포괄적 합의’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이 같은 근본적 접근법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시작부터 그랬어야 했다. 정상회담을 2차례나 하고 이미 정상 간 합의도 해놓은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 와서 할 말은 아니다. “올바른 합의가 필요하다”는 트럼프의 말은 자신이 덜컥 도장을 찍어준 싱가포르 합의가 ‘잘못된 합의’라는 고백인 동시에 더 이상 그것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뜻이다. 미국이 골대를 옮긴 것이니 북한으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북한은 협상에서 한 수 삐끗하면 끝장이지만 미국은 실수를 해도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이 있다.


당황한 것은 북한뿐 아니다. 청와대도 적지 않게 당황하고 있다. 사실 미국의 태도는 돌변한 것이 아니라 싱가포르 합의 직후부터 이어졌던 것이다. 청와대가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든 북·미관계가 앞으로 나가기만을 원했을 것이다. 부실한 싱가포르 합의를 기초로 그 위에 남북 경제협력 등의 구조물을 올리고 북·미가 모두 되돌아갈 수 없는 지점을 빨리 통과하기를 기다리다가 암초를 만난 것이다. 


이제 상황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북·미는 협상의 방식을 논하는 초기 단계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청와대는 북한의 단계적 방식과 미국의 포괄적 접근법 사이에서 접점을 찾으려 한다. ‘포괄적 합의와 단계적 이행’으로 절충점을 모색하려는 생각인 듯하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다.


미국의 입장은 ‘포괄적 합의를 위한 동시·병행적 추진’이다. ‘동시’는 상응조치의 시퀀싱(배열)을 의미하는 것이며 ‘병행’은 비핵화·관계개선·안전보장 등 협상의 모든 요소를 한꺼번에 입체적으로 다뤄나간다는 말이다. 언뜻 보기에는 단계적 접근과 유사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르다. 포괄적 합의에 도달하려면 협상의 모든 요소들이 다 논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접근법은 근본적이긴 하지만 합의를 만드는 것 자체가 어렵다. 트럼프는 하노이에서 미국이 원하는 비핵화의 최종적 모습을 보여줬다. 포괄적 합의가 이뤄지려면 김정은도 자신이 원하는 비핵화의 최종적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리고 양측이 비핵화 조치, 관계 정상화 방안, 구체적 체제안전 보장책 등 모든 요소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합의해야 한다. 군사적 문제는 물론 주한미군이나 핵우산 제공과 같은 문제들도 포함된다. 


북한이 미국의 방식을 따를지도 불투명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도 합의에 이르는 것은 더욱 어렵다. 트럼프가 지금 “서두르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유다. 북한도 조기에 제재 해제를 얻어내려는 생각을 접고 ‘자력갱생’을 외치며 장기전에 대비하고 있다. ‘조기 수확’이 절실히 필요한 청와대로서는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청와대는 북·미관계를 서둘러 봉합하려는 조바심을 버려야 한다. 현재의 평화 상태를 유지하는 데 주력하면서 장기적 관점에서 비핵화를 포함한 한반도 평화정착프로세스를 추진해야 한다. 지금은 빠른 진전이 아니라 뒷걸음치지 않는 견고한 진전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기 내에 결실을 보려는 생각을 버리고 초석을 놓는 데 집중해야 한다. 남북관계와 한·미 동맹을 유지하면서 비핵화를 완성하고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를 정착시키는 일이 1~2년 사이에 이뤄질 일은 결코 아니다.


특히 청와대가 한반도 문제 해결의 기본전제인 비핵화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당시부터 비핵화 자체보다 비핵화 진전을 전제로 한 한반도의 미래에 집중해왔다. 지금도 북·미를 만나게 하고 어떤 방식이든 북·미가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그것을 기초로 한반도의 미래를 그려나가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지금 청와대에서 ‘굿 이너프 딜’과 같은 무책임한 표현이 나오는 것이 그 방증이다. 한반도의 미래는 물론 중요한 일이지만 그보다 앞서 모든 것의 전제가 되는 비핵화를 이루기 위한 정교한 전략을 세우는 데 집중하는 게 먼저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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