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노딜’은 싱가포르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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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하노이 노딜’은 싱가포르에서 시작됐다

by 경향글로벌칼럼 2019. 3. 15.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은 어쩌면 필연이다. 두 정상이 회담장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기이한 대화방식 때문만은 아니다.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인식 차이가 하노이에서 비로소 충돌했다는 것이 직접 원인이다.   


‘하노이 노딜’의 씨앗은 지난해 싱가포르 1차 정상회담에서 뿌려졌다. 싱가포르 합의는 신뢰구축을 통한 새로운 관계수립-평화체제-비핵화의 순서로 정리돼 있다. 미국의 ‘선(先)비핵화’ 요구를 차단한 김정은의 승리이자, 준비 없이 회담장에 들어간 트럼프의 패배다. 내색하지는 못했지만 트럼프는 싱가포르에서 돌아온 다음날부터 그 합의에서 벗어날 길을 찾았다. 지난해 북·미 대화가 일시중단되고 위기를 맞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트럼프는 싱가포르 합의를 덮어버릴 새로운 합의가 필요했다. 반면 북한은 싱가포르 합의를 구체화하기 위해 2차 회담이 필요했다. 하노이 회담은 북한에는 ‘싱가포르 합의 굳히기’였고 미국에는 ‘싱가포르 합의 바로잡기’였다. 


미국의 접근법은 현실적으로 변했다. 완전한 핵신고, 핵탄두 반출과 같은 1차 때의 황당한 발상을 접었다. 하지만 그것이 북한의 단계적 비핵화 기조와 가까워진 것은 아니었다.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는 지난 1월 스탠퍼드대 강연에서 “싱가포르 합의를 동시·병행적으로 추진하겠다”고 했다. 이 말은 싱가포르 합의를 순차적으로 이행하지 않고 동시에 하겠다는 뜻이다. 후순위로 처져 있는 비핵화를 앞으로 끌고 나오겠다는 선언이다.


트럼프는 하노이에서 ‘모든 대량살상무기(WMD)의 동결과 폐기 약속’을 요구했다. 싱가포르 합의에 담지 못해 엄청난 비난을 받았던 바로 그 내용이다. 하지만 김정은은 ‘영변 핵시설 폐기와 제재완화’만을 반복했다. 비핵화는 싱가포르에서 이미 정리됐으니 이번에는 그 연장선에서 신뢰구축의 이행, 즉 제재완화가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또한 영변 핵시설 폐기라는 ‘큰 선물’을 내주면 트럼프가 반색할 것으로 생각한 듯하다.


그러나 트럼프에게는 영변 핵시설보다 WMD 폐기 약속이 더 절실했다. 그 약속이 없으면 영변도 소용없다. 만약 영변 폐기만을 들고 미국으로 돌아갔다면 트럼프는 ‘죽은 말’을 또 사왔다는 비난과 영변 이외의 핵시설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공격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 WMD 폐기 약속을 받으면 ‘북한은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격했던 반대파들에게 할 말이 생긴다. 영변 폐기는 실질적 비핵화 조치이지만, 정치적으로는 WMD 폐기 약속이 훨씬 잘 팔리는 상품이다. 트럼프가 그런 약속이 없는 영변 폐기를, 그것도 유엔제재의 핵심요소를 풀어주고 받아올 수는 없었다.


트럼프의 제안도 북한이 원하는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트럼프는 ‘경제적으로 밝은 미래’를 보장하겠단 말로 북한의 WMD 포기 약속을 받아내려 했지만, 체제보장과 안보환경 변화가 정교하게 제시되지 않은 WMD 포기 약속에 김정은이 도장을 찍을 리 없다. 


트럼프가 하노이에서 보여준 태도는 변덕도, 갑작스러운 전략 변화도 아니다. 싱가포르 합의 이후 지속적으로 추구했던 내용이다. 트럼프가 싱가포르 합의를 구체화한다는 레토릭을 앞세워 실제로는 ‘싱가포르 합의 형해화’를 시도해왔음을 파악하지 못하면 지금 미국의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트럼프는 원하는 바를 얻지는 못했으나 상황을 싱가포르 합의 이전으로 되돌리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물론 ‘하노이 노딜’이 끝은 아니다. 하지만 험난한 여정의 원점으로 되돌아온 것은 사실이다. 지난 1년간 북·미는 요란하게 친분을 과시했지만 행동으로 이뤄진 것은 없다. 핵무기는커녕 중고차를 거래할 정도의 신뢰도 아직 없다. 이것이 북·미 대화가 시작된 지 1년이 지난 지금 한반도가 맞닥뜨리고 있는 냉엄한 현실이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방문을 쾅 닫아버리고 나가지 않았다는 점, 서로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비로소 알게 됐다는 점이 위안거리일 뿐이다. 


앞으로가 문제다. 미국은 비핵화 과정에 북한의 의무뿐 아니라 자신들이 해야 할 의무도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북한은 자신들의 마지막 카드가 핵무기인 것처럼 미국의 마지막 보루는 제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미국 내 여론이 북한과의 대화를 얼마나 끔찍하게 여기는지, 트럼프가 지금 정치적으로 얼마나 무모한 길을 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염두에 둬야 할 것도 있다. 한반도 비핵화가 매우 힘든 작업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한 트럼프가 앞으로 이 문제에 급격히 흥미를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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