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죽창가와 서희
본문 바로가기
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경향의 눈]죽창가와 서희

by 경향글로벌칼럼 2019. 7. 18.

국제정치 무대에는 문명과 야만이 공존한다. 대화·타협·배려·상호존중·설득에서는 문명이, 협잡·배신·모욕·완력·이기심에서는 야만이 얼굴을 내민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불만을 가진 국가가 만족하는 나라를 상대로 집적거리는 무질서한 세상”이라는 폴 케네디의 말을 빌리면, 문명보다는 야만의 힘이 우세한 세계임이 틀림없다. 이른바 문명국가라고 자부하는 한국과 일본에서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한·일 갈등은 대부분 과거사 문제에서 출발했다. 과거사에 대한 공감의 정도에 따라 한·일관계는 춤을 추었다. 요즘 상황도 궁극적으로는 과거사 정리가 미흡했기 때문이다. 1965년 한·일 양국은 모호한 내용을 놔둔 채 청구권협정을 체결했다. 양국은 이를 자국의 입맛대로 해석했고 국민 설득에 이용했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음으로써 일본이 한일합병의 불법성을 인정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일본은 불법성과는 무관하게 경제원조라고 풀이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지난해 대법원의 판결은 한일합병이 불법이었고 따라서 일본이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은 이미 청구권협정으로 5억달러를 한국에 지불함으로써 모든 배상이 끝났다는 입장이다. 일본의 반발은 불 보듯 했다. 현실적으로 경제적인 행위들이 이뤄진 마당에 정부는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면서 양국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방안을 찾아야 했다. 한·일관계는 청구권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북, 한·중, 한·미, 나아가 동아시아와 글로벌 이슈에 머리를 맞대고 협조해야 할 국가다. 


그런데 한일의원연맹 소속 의원과 일본 관련 전문가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정부가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선 모습은 찾기 힘들다. 오히려 일본이 한국 정부에 한국 사법부의 판결에 대한 협의를 요구했으나 한국 정부가 미온적으로 대처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일본의 반격 가능성을 전문가들이 정부에 경고했다는 말도 나온다. 한·일 간 정면충돌에 정부의 책임이 없다 할 수 없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아무런 외교적 협의나 노력 없이 일방적으로 조치를 취했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정부는 일본이 비상식적인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한 것 같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에 허를 찔렸다. 일본은 무역보복 조치를 감행했다. 일본은 반도체 제조에 쓰이는 고순도 불화수소 등 3가지 품목의 한국 수출규제에 나섰다. 한국이 절대적으로 일본에 의존하는 소재다. 규제 이유는 ‘북한 화학무기나 독가스 개발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얼토당토않다. 하지만 문제는 일본이 갖은 이유를 대면서 앞으로도 보복수단을 동원할 것이라는 점이다. 


일본은 수출규제를 하면서 적어도 2가지를 각오하고 있다. 먼저 한·일 간 신뢰관계의 균열이다. 일본은 “한국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밝혔다. 한·일 정부 간 믿음에 금이 갔고, 기업 간 수십년 동안 쌓아온 신뢰도 흔들리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불신의 골은 깊어질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본이 자국 기업의 피해를 각오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나라 기업은 국제분업의 사슬에 매여 있다. 서로가 필요한 공생관계다. 한국 기업이 피해를 입으면 일본 기업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일본은 자해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생각이다. 


아베 총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중국을 상대로 했던 방식을 원용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이 가장 아파할 곳을 찔렀다. 미국이 타깃으로 삼은 중국 화웨이는 미래산업인 5G산업의 총아다. 미국은 화웨이 규제 이유를 ‘미국 안보 위협’이라고 했다. 일본은 한국 경제의 버팀목인 반도체산업을 공략 대상으로 삼았다. 이유도 ‘일본 안보 위협’이라고 했다. 미국은 중국을 상대로 규제 강도를 높이면서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미국은 중국이 저항하자 관세규제 대상을 전체 수입품으로 확대했다. 일본도 수출규제 품목은 3가지로 출발했으나 대폭 늘어날 것이다. 당장의 대처 방안이 없다. 시간은 공격자의 편이다. 미·중 갈등 속에 중국의 올 2분기 성장률이 27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외교는 도덕이 아니다. 정의(正義)도 각자의 해석에 달려 있다. 한·일 무역갈등이 장기화하면 한국의 미래산업은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피해가 일본보다 크다. 자신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문제라면, 더 큰 문제는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반일감정이나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은 대책이 아니다. 우리 기업에 부메랑이 될 수 있다. 위정자는 감상이나 울분이 아닌, 냉정한 시각으로 세상을 진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건 죽창가가 아니라 거란 소손녕의 입을 틀어막고 강동6주를 획득한 서희의 외교술이다.


<박종성 논설위원>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