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핵심을 비켜가는 비핵화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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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기고]핵심을 비켜가는 비핵화 협상

by 경향글로벌칼럼 2018. 10. 8.

지난 6월12일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비핵화 추진에 대한 신뢰성을 보여주기 위해 몇 가지의 선제조치를 취했다. 2017년 11월 ICBM인 화성-15형 시험발사 후 미사일 시험발사도발의 지속적 중단, 5월 풍계리 핵시험장 폭파, 그리고 동창리 서해발사장에 위치한 미사일 대형액체로켓엔진 시험시설의 파괴와 위성발사장 관련시설의 해체를 추진했다. 현재 북한은 이러한 선제조치에 대해 미국의 상응조치가 없다는 판단하에 중단한 상태로 보인다. 지난 9월 남북정상은 3차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평양공동선언을 발표했다. 합의문에도 “북한은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하에 우선 영구적으로 폐기하기로 하였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동창리 액체로켓엔진의 시험시설은 미사일 엔진의 성능과 연소특성 등을 측정하는 수직연소시험시설(Vertical Test Stand)로서 이를 파괴한다면 상징적인 홍보 효과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험시설을 재구축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위한 주목표 중 하나인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ICBM(화성-15형)용 백두산 엔진을 개발한 상태에서 이러한 대형 액체로켓엔진 시험시설의 필요성은 낮아졌다.

 

한편 동창리 발사장의 발사대는 위성발사체를 위한 것이지 미사일 발사대는 아니다. 동창리 위성발사장을 폐기한다면 북한은 지난 10년 이상 개발해왔던 위성 및 발사체 프로그램을 중단한다는 홍보를 할 수 있다. 현대의 미사일은 동창리 발사대와 같은 고정 발사대를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동창리 고정 발사대는 이미 수많은 감시정찰자산에 의해 추적되는 터라 미사일 발사 전에 발사징후를 포착해 선제타격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북한도 스커드와 같은 단거리미사일로부터 화성-15형 ICBM까지 이동식미사일발사대를 사용하여 발사가 가능한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선제조치는 북한 핵무기 비핵화와의 연계성은 낮은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결국 미국은 현재까지 북한이 취한 선제조치가 비핵화와의 연계성이 낮은 핵심을 비켜 가는 프로세스로 간주하는 듯하다. 또한 전문가의 참여 없이 풍계리 핵시험장을 폐기한 것도 필요하면 언제든지 다시 복구하거나, 핵시험장의 지반 약화로 인한 자동 폐기로 여기기 때문에 이를 선의로 받기 어렵다는 의미로 보인다.

 

미국은 지난 6월 1차 북·미 정상회담까지 북한 비핵화를 위한 목표로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폐기)’를 제시했으나, 북한은 전쟁 패전국에나 요구하는 원칙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결국 지난 7월 폼페이오 장관의 3차 방북 직전 비핵화 목표로 새로운 용어인 ‘FFVD(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핵폐기)’를 등장시켰다. ‘불가역적인’이란 용어를 삭제하고 ‘검증’에 무게를 둔 목표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북한과 미국의 상호신뢰 부족으로 인해 이러한 비핵화 목표에 대한 언급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비핵화 목표나 비핵화 시간보다 비핵화 프로세스의 시작이라도 해보자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비핵화 핵심을 비켜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비핵화 프로세스의 초기 행위는 핵무기, 핵물질, 핵시설 등에 대한 신고이다. 이에 대한 상응조치로 종전선언을 하는 방안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북한이 다시 핵무기 관련 신고에 대해 강력한 저항감을 나타내자, 현재는 영변시설의 폐쇄와 종전선언을 맞바꾸는 방향의 비핵화 초입단계를 모색하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 핵탄두미사일로서 한국에 위협이 되는 미사일은 ICBM이 아닌 액체추진제를 사용하는 노동미사일이나 고체추진제를 사용하는 북극성-2형과 같은 중·단거리 미사일이다. 미국은 실제 자국의 안보와 관련이 있는 장거리미사일인 ICBM의 발사중단 모라토리엄과 비핵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한국에 영향을 미치는 중단거리 핵탄두미사일은 비핵화 협상에 포함되지 않고 있어, 비핵화 협상에서는 이러한 사항도 반영되어야 한다.

 

현재와 같은 비핵화 프로세스의 정체는 북한과 미국이 서로 믿지 못하는 상황에 기인한다. 양측은 각자 비핵화 협상의 핵심에서 벗어나 원론적인 선제조치와 상응조치만 요구하고 있다. 서로 과거와 같은 속임수에 당하지 않겠단 잠재의식에서 못 벗어나는 것이다. 비핵화 프로세스의 정체를 극복하기 위해 북한과 미국의 통 큰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장영근 | 한국항공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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