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개혁과 사실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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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

노동개혁과 사실 확인

by 경향글로벌칼럼 2016. 1. 3.

멕시코의 1917년 헌법은 ‘20세기 최초의 사회혁명’으로 알려진 멕시코 혁명의 무장투쟁 단계를 사실상 마감하는 문서로서 막강한 권한의 대통령 중심제, 모든 선출직의 재선 금지, 반(反)교권주의, 토지개혁과 노동개혁 조항 등을 명시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성격의 헌법이라 할 만했다. 노동개혁과 사회보장의 요지를 정리한 123조에 따르면, 의회는 노동자, 날품팔이, 가내 고용인, 장인을 포함해 모든 노동계약에 적용되는 법을 제정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할 터였다. 하루 최대 8시간 노동과 최대 7시간의 야간노동 규정, 여성과 16세 이하 미성년자의 위험하고 유해한 작업이나 오후 10시 이후 노동 금지, 14세 이하 미성년자의 노동 전면 금지, 16세 이하 미성년자의 하루 6시간 노동 제한, 6일 노동과 하루 휴식, 임산부의 산후 유급 휴가와 고용 유지, 하루 30분씩 2회의 특별 육아 시간 부여, 최저임금 규정,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지불, 노동자의 기업 이익 분배 참여 자격 인정, 초과 근무 수당 지급, 하루 3시간 이상과 3일 연속 초과 근무의 금지, 고용주와 노동자의 이익 보호를 위한 단체조직과 파업·공장폐쇄 등 단체행동권 보장, 공익을 위한 사회보장법 제정, 분쟁 사건의 연방노동중재위원회 제소 허용 등.

지금까지 내 머릿속의 노동개혁이란 이런 내용을 상술하고 보장하는 대책이었다. 하지만 ‘4대 개혁’을 표방하는 한국의 정부 관계자들에게 노동개혁이란 노동자의 권리 보호를 위한 게 아니라 노동자를 개혁 대상으로 겨냥해 추진하는 조치를 의미하는 듯하다. 소통 가능성을 차단하는 용어상의 혼란을 줄이고자 역사적 용례를 살펴보면, 노동개혁은 예컨대 고용주가 직장에서 노조의 결성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면서 시대의 변화와 국제적 표준에 맞도록 관련 법령을 개정하는 것이다. 대공황 시기에 통과된 미국의 노동관계법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연방노동관계위원회를 설립하고 노동자와 노조의 권리를 명기하며 노사 분쟁의 해결을 도모하려 했다.

21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경제5단체장이 '노동개혁 입법 촉구를 위한 경제5단체 긴급 기자회견'을 위해 입장하고 있다._서성일 기자


그러므로 한국 정부가 실행하려는 것은 노동개혁이라기보다 노동시장 또는 노동관계법의 개편이라 해야 할 것이다. 민주노총이 없었다면 1인당 국민소득이 꽤 올랐을 것이라는 여당 대표의 근거 없는 선동이나 균형감각을 잃은 언론매체의 홍보가 이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정책의 심화에 조력하면서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풀어내고 ‘갑’의 지속적 승리를 보증하는 환경 조성에 매진하고 있다. 또 2015년의 막바지에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노동개혁 2대 지침’ 초안은 ‘저성과자’의 일반해고 가능성과 취업규칙 변경요건 완화를 수면 위로 드러냄으로써 노동 현장에 불안감을 선사하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노동자의 안내자가 아니라 기업의 외부 위탁업체처럼 보이는 현실은 IMF 구제금융 수혜 이후 도래한 기업 사회의 위세를 예증하고 고용 불안과 사회경제적 양극화 심화의 긴 그늘을 예고하는 셈인가. 고용노동부 장관은 몇 주 전 청년과의 일자리 관련 간담회에서 노동시장 개편에 관한 팩트, 사실관계를 잘 파악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19세기 중엽 찰스 디킨스가 산업혁명의 그늘을 묘사한 소설 <어려운 시절>(Hard Times) 첫 구절에 나오는 토머스 그랫그라인드 선생의 신념과 유사하다. 디킨스가 지독히 현실적인 “사실과 계산의 인간”으로 표현한 그랫그라인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팩트뿐. 아이들에게 팩트만 가르쳐요. 살아가는 데는 팩트만 필요한 거요”, “너는 공상이란 단어를 완전히 버려야 해.” 정부 관계자들에게 이 인물의 발언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정부는 희망적 관측과 사실을 섞지 말고, 다시 말해 공상하지 말고 어려운 시절을 맞아 노동개혁보다 서민 생활 안정을 올해의 최우선 국정 현안으로 손꼽는 국민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직시하라.


박구병 | 아주대 교수서양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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