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졸릭과 미국의 ‘복합외교’
본문 바로가기
국제뉴스 쉽게 알기

로버트 졸릭과 미국의 ‘복합외교’

by 경향글로벌칼럼 2012. 5. 31.

손열 | 연세대 교수·국제정치


 

재미동포 김용 다트머스대 총장에게 세계은행 총재직을 물려주고 퇴임하는 로버트 졸릭은 탈냉전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한 흥미로운 인물이다.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재무부를 거쳐 국무부에 입성한 졸릭은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2+4 협상을 이끌며 통일독일이 유럽에 안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창설에 핵심 브레인이었으며,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주도하고, 무역대표부(USTR) 대표로서 수많은 FTA를 성사시킨 협상의 귀재이다. 또 미국의 신통상정책을 ‘경쟁적 자유화’로 정의해 국익을 도모하고, 국무부 부장관 시절 부상하는 중국을 ‘책임있는 이해당사자’로 부르면서 조건부 관여정책을 띄웠으며, 세계은행 총재 재임시 미·중시대를 뜻하는 ‘G2’를 선구적으로 사용하는 등 언어의 연금술사이기도 하다. 



로버트 졸릭



재무부, 국무부, 백악관, 월가(골드만삭스와 패니메이), 세계은행을 오간 졸릭의 이력서는 국익의 다면적 성격을 이해하고 이를 추구하기 위해 군사, 통상, 개발 정책수단을 통합적으로 활용하는 복합외교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FTA를 활용한 그의 통상외교는 시대를 풍미한 신자유주의 혹은 워싱턴 컨센서스의 확산정책과 같은 단순한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이 경제적 효율을 극대화하는 기제이며 나아가 시장의 자유가 인간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특히 무역의 자유는 신자유주의적 사고의 핵심이다. 무역은 경제적 효율을 넘어 자유의 습관을 창조하고, 나아가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를 높인다고 믿는다. 졸릭은 포괄적이고 고수준의 자유화를 지향하는 FTA 모델을 창조하여 여타 국가들이 미국을 따라 경쟁적으로 시장개혁에 나서고, 그 대가로 미국시장에 자유로운 접근을 부여하는 전략을 추구했다.


그러나 졸릭은 자유무역 혹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가 아니었다. 그는 무역과 국가안보가 연계되어 작동하는 현실을 날카롭게 파악하고 시장의 자유가 정치적 안정과 민주주의를 가져온다는 나이브한 등식을 믿지 않았다. 무역관계를 확대하여 경제적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동맹효과를 기하는 현실주의 전략을 취하였다. 그가 초동단계에 관여한 한·미 FTA는 증대하는 중국의 지역적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추진한 측면이 있다. 오만과 바레인 두 중동국가와의 FTA 추진도 좋은 사례이다. 여기서 시장주의 원칙은 필요에 따라 타협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한편 졸릭은 자유무역이나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추진함에 있어서 항상 국내정치적 고려를 염두에 두었다. 즉, 정책과 정치의 연계이다. 그는 자유무역 원칙이 국내정치적 이익과 상치되는 경우 주저없이 중상주의자, 일방주의자로 돌변하였다. 2003년 미국정부가 농업부문에 거대한 보조금을 지불하여 농산물 수입을 억제하는 보호주의를 취했을 때 이를 묵인하면서 자국 농업의 수출을 위해 상대국의 시장개방을 요구하는 이중적 행위를 능란하게 구사하여 업계의 칭송을 받은 적이 있다.


이렇게 보면 미국의 신자유주의란 보편성을 추구하는 이념인 동시에 특정 엘리트집단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체계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 원칙은 자국의 전략적 우위를 지키고 기업의 상업적 이익을 확대하려는 필요와 상충할 때 쉽게 타협될 수 있었다. 무역은 군사안보적 우위가 기업의 상업적 이익을 보장해주고 또다시 군사적 우위를 강화하는 제국적 선순환구조의 매개고리로 활용되어 왔다. 


졸릭류의 복합외교는 2010년대 동아시아에 대한 적극적 개입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은 경제적 관여의 두 축으로 환태평양동반자협정(TPP)이란 고수준 개방의 FTA 네트워크, 미·중 전략경제대화를 통한 중국의 시장개방을 추진하고 있다. 일견 신자유주의 원칙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 이면에는 상업적 이익과 중국 견제의 전략적 고려가 교차하고 있어서 미국은 생각보다 탄력적이고 타협적으로 나올 수 있다. 미국의 속내를 정확히 읽어내면서 우리의 국익을 다면적으로 면밀히 계산하는 복합외교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반응형

'국제뉴스 쉽게 알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고]스타벅스 탈세  (0) 2012.11.2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