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조각 난 권위와 신뢰
본문 바로가기
경향 국제칼럼

산산조각 난 권위와 신뢰

by 경향글로벌칼럼 2016. 11. 8.

박근혜 대통령은 당장 하야하는 것이 자신과 대한민국을 위하는 애국의 길이다. 이 상황에서 임기를 다 채우겠다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동정심을 자극하거나 개인적 외로움을 하소연하는 처량한 모습은 5000만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또 과거 정권의 유령들을 불러내 만든 식물 정부로 국민의 분노를 달래겠다는 계산은 민심에 대한 무지와 경멸을 동시에 보여준다.

 

대학원 세미나에서 학생들에게 한국의 현 정국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한 학생이 “원래 권력자 주변에는 마력이나 친분으로 정신적 영향을 미치고 국정을 좌우하는 사람들이 넘친다”며 하나도 놀랍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프리카 토고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원래 후진국에선 공과 사의 구분이 없으며 제도와 시스템을 통해 정책을 결정하지 않는다. 권력자 개인과 그 친구들이 국가대사를 뒤흔든다. 불행히도 민주화 30년을 맞이하는 한국이 처한 상태다.

 

선진 민주국가라고 황당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2003년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이라크전쟁을 일으켰다. 대량살상무기를 선제공격으로 제거하겠다고 했지만 무기는 찾을 수 없었다. 정보의 허구와 조작에 대한 조사는 사후적으로 진행되었고 이들은 국정운영의 공식 채널로 정책을 결정했다며 임기를 채웠다. 비극은 이라크의 내전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이슬람국가(IS)의 테러는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탈세와 권력남용, 여자친구의 장관 임용, 미성년자와의 매매춘, ‘붕가붕가 섹스 파티’ 등 희한한 명목으로 비판을 받았다. 이런 점에서 비선의 국정개입, 승마와 부정입학이나 ‘호빠’ 등 신기한 아이템이 등장하는 최순실 사건과 유사하다. 최고 권력자의 일탈로 국제적 권위와 신뢰가 무너지면 개인이나 정당뿐 아니라 국가의 위신과 명성이 모두 타격을 입는다. 베를루스코니 정부에 대한 국제금융의 불신으로 2011년 이탈리아는 재정위기를 맞았고 그로 인해 유로권 전체를 붕괴의 위험에 몰아넣었다. 안간힘을 다해 버티던 베를루스코니를 사임하게 한 것은 주변 유럽국의 지속적인 압력과 국내의 연정 붕괴다.

 

최근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유럽연합 잔류와 탈퇴를 두고 국민투표라는 정치적 도박을 벌였다. 브렉시트라는 결과가 나오자 그는 총리뿐 아니라 의원직도 깨끗하게 사임함으로써 정치에서 물러났다. 제도나 법의 의무사항이 아니었지만 정치적 책임을 진 것이다. 다행히도 민주주의는 리더가 사라지거나 물러나도 이를 곧바로 대체할 수 있는 제도를 보유한다. 영국의 보수당은 테리사 메이를 총리로 지명했다. 한국도 헌법에 따라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면 그만이다. 국정공백이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식물 정권을 1년 이상 지속시키겠다는 주장은 기득권 유지나 정치공학적 계산에 불과하다.

 

박근혜 정권은 국제적으로 한국을 이미 충분히 망신시켰다. 자격 없는 국무총리를 임명하려다 두 번이나 실패한 ‘총리 도루묵’ 사건은 비극적 코미디였다. 최근 집권당의 대표는 단식투쟁으로 “죽겠다”고 외치더니 기득권 수호의 펄펄한 화신으로 부활했다. 세계적 조사와 지표에서 한국은 부정부패의 나라, 밀실 정책의 온실, 교육과 사법질서가 엉망인 국가로 인식되어 외국인의 투자는 줄고 일자리는 도망갈 것이다. 이 정권이 초래한 국가 이미지 실추에 대한 추징금은 얼마면 적당할까. 스캔들로 눈물 흘리는 대통령, 침몰하는 배에서 쥐들이 도망가듯 비서들마저 거리두기에 나선 나라가 어떻게 제대로 외교를 할 것인가. 불행히도 이미 산산조각 난 정부의 권위와 신뢰를 다시 붙일 길은 없다. 하야만이 국가와 민족의 피해를 줄이는 유일한 길이다.

 

조홍식 | 숭실대 교수·정치학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