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칼럼]반북 강박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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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송두율 칼럼]반북 강박장애

by 경향글로벌칼럼 2019. 1. 22.

모두가 궁금하게 여겼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신년사 내용을 확인하려고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컴퓨터를 켰다. 그런데 먼저 눈에 들어온 독일 매체들의 기사 제목은 하나같이 북한이 다시 미국을 협박한다는 자극적인 내용이었다. 그래서 곧 미국에서 나온 기사와 논평을 찾아보니 이와는 조금 달랐고, 일부 언론은 신년사에 나온 남북관계 개선과 북한의 경제발전 전략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한반도와의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같은 사실의 보도 내용도 이같이 서로 다르다.


이런저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외국 언론매체는 역시 신년사에서 단 한 번 언급된 ‘새로운 길’의 내용에 주목하고 이를 해석하는 데 매달렸다. 새로운 길이 북·미 협상을 재촉하는 북한의 협박인지, 아니면 오히려 절박감의 호소인지를 둘러싸고 엇갈린 해석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새로운 길을 현재 진행 중인 북·미 협상을 파기하고 비핵화를 포기하겠다는 내용으로 확대 해석하며, 북한이 미국을 다시 위협하고 있다고 논평했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30년 전에 발표한 나의 논문 ‘북한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다시 떠올렸다. 냉전시기에 북한을 보던 시각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화백


이 글이 발표된 이후에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독일 통일, 소련의 해체, 톈안먼 사태에 이은 중국의 급격한 부상(浮上) 등, 일련의 큰 세계사적인 변화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북한에도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에 이어 김정은 체제가 등장했다. 이런 가운데 지속적으로 이어진 담론 중 하나가 북한의 붕괴였다. 심지어는 점을 치듯이 붕괴의 정확한 시점까지 예견하는 논문도 있었다.


1994년 10월 미국이 제네바에서 북한에 2기의 경수로 건설에 합의한 것도 경수로의 완공 이전에 북한이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오바마의 ‘전략적 인내’도 시간은 기본적으로 북한에 불리하게 작용하기에 기다리면 북한이 스스로 항복의 길을 택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북한은 오히려 그사이에 키운 핵무력을 바탕으로 두 번째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까지 왔다.


프로이트가 ‘반복강박장애’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비근한 예로 어떤 물건이 놓였던 장소에 그대로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계속 불안하기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놓았던 물건이 그대로 있는지를 확인해야만 하는 사람이 있다. 이에 대한 치료법의 하나는 환자로 하여금 정반대의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다. 즉 깨끗하게 정돈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흐트러진 상태를 받아들이는 사고와 행동을 반복하게 만든다.


‘불량국가’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당연히 배제되어야 할 대상이라고 미국은 오랫동안 생각하고 행동했다. 여기에는 민주당이나 공화당이나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그래서 자신들의 예측과 다른 변화나 현상이 설사 나타나더라도 같은 생각과 행동을 늘 반복해왔다. 비교적 합리적인 논조를 지킨다는 뉴욕타임스 같은 매체도 예외는 아니었다. 얼마 전에 이 신문은 ‘숨겨진 북 미사일 기지’라는 과장된 보도로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다. 트럼프는 이렇게 반복되는 강박에서 벗어나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전임자나 여론의 사고와 행동과는 정반대로 정상회담이라는 파격적인 형식을 통해 김정은 위원장을 직접 만나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이러한 만남과 대화 그리고 협상이 갈등의 근본적인 해소로 곧 연결되지는 않지만 어떤 경우든 대화 없는 갈등보다는 대화 있는 갈등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 상대방을 잘 알기 때문에 소통(疏通)이 가능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탈코트 파슨스(1902~1979)의 구조기능주의와 니클라스 루만(1927~1998)의 사회체계이론은 서로가 상대방을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소통이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는 ‘이중적 우연성(二重的 偶然性)’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바둑을 둘 때 서로가 상대방의 수를 대국 이전에 완전히 읽을 수 있다면 무슨 재미로 바둑을 두겠는가. 서로가 상대방의 수를 모르는 상황에서 대국은 시작되기 마련이다.


북핵 문제를 둘러싸고 북·미 간에 여전히 펼쳐지는 상대방에 대한 요구, ‘네가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들어준다면 나도 네가 원하는 것을 해주겠다’는 팽팽한 기싸움도 실은 이런 이중적 우연성에 기인한다. 이는 서로가 상대방의 의도를 확실히 알 수 있다거나, 전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우선 배제한다. 이중적 우연성은 갈등 해결의 가능성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험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위험을 완전히 해소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이를 축소하고자 하는 수단으로 우리는 많은 경우 법체계에 의존한다.


‘핵확산금지조약(NPT)’도 그러한 법적 장치의 하나다. 그러나 인도, 파키스탄 그리고 이스라엘의 핵보유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는 물론, 최근 핵무기 보유 선언국 사이에 다시 불붙는 핵무기의 현대화 경쟁은 이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북한은 보편적인 정당성을 밖으로 내건 국제법적인 체계보다 이를 실질적으로 구축한 미국과의 직접적인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의 길을 찾았다.


1차 북·미 정상회담은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 정착 그리고 북·미관계의 정상화에 대해 원론적인 합의를 도출했다. 2월 말에 열리게 될 2차 북·미 정상회담은 이를 바탕으로 비핵화와 제재 완화의 상호연동(聯動)에 관한 구체적 내용과 일정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합의를 도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에 여러 경로를 통해 북·미 간에 주고받은 메시지의 내용을 검토하면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될 내용의 윤곽도 드러난다. 북·미 간에 걸린 이중적 우연성이 안았던 위험부담도 그간 상당히 감소되었기 때문이다. 회담 장소가 아직 발표되지 않았고, 비핵화가 될 때까지 제재가 계속될 것이라는 백악관 대변인의 브리핑을 토대로 비관적인 전망도 나온다. 그러나 변화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판단한다면 무엇 때문에 다시 정상회담을 여는 데 북·미가 합의했겠는가.


‘꼬마 로켓맨’(2017·9·24)으로부터 시작해, ‘더 이상 북한으로부터 핵위험은 없다’(2018·6·13)를 거쳐 ‘다음번 정상회담을 갈망한다’(2018·12·24)는 트럼프의 트위터 내용의 변화를 보면 북핵을 매개로 시작된 북·미관계의 극적인 변화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에 이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오히려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사람도 많다. 반북(反北)강박장애를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여전히 많다. 이들은 북한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대화 자체가 아예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를 움직인 것은 목소리가 아니라 바로 귀였다’라고 이탈리아 작가 이탈로 칼비노(1923~1985)는 증언한다. 남의 이야기가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경지를 의미하는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이라는 공자의 가르침도 실은 같은 내용을 의미한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부터 대화는 시작된다.


<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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