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은 왜 부산을 공격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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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유신모의 외교 포커스

이순신은 왜 부산을 공격하지 않았나

by 경향글로벌칼럼 2021. 1. 29.

서울중앙지법이 지난 8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을 내린 것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곤혹스럽다”라고 했다. 정의기억연대(정의연)는 ‘역사적인 판결’에 곤혹스러움을 표했다는 이유로 대통령을 격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그런 이유로 비난받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한 국가의 권력 행위는 타국의 재판 관할권 밖에 있다는 ‘국가면제(주권면제)’를 인정하지 않은 것에 이 판결의 의미가 있다. 위안부 문제 본질이 아닌 재판 관할권에 대한 판단이므로 승소든 패소든 일본이 반인권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국제관습법의 국가면제는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국제적 대세다. 그래서 이를 인정하지 않은 한국 법원의 판결은 국제법 관점에서 획기적이다. 그러나 ‘너무도 선구적인’ 판결이어서 아직은 국제적 지지를 받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다. 문 대통령이 곤혹스러운 것은 일본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판결에 따른 국가적 부담 때문이다. 정의연의 대통령 비난은 번지수가 틀렸다.

 

이 판결은 한국 법원의 선진적 인식을 보여줬지만 대가는 클 것이다. 국가면제는 위안부 문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판결 논리대로라면 한국은 세계사적인 각종 사건들에 대해 국제적 흐름과 배치되는 입장을 가져야 한다. 한·일 간 위안부 논쟁은 이제 국가면제 적용 여부로 전선이 확대됐다. 한국에는 결코 유리하지 않은 전선이다. 윤리적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에 수세일 수밖에 없는 일본은 한국을 공격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을 얻었다. 승소했음에도 배상을 받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일본이 사죄할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기 때문에 피해자들에게는 실익이 없다. 문제 해결은 더 어려워졌고 한·일관계도 더 깊은 수렁으로 들어가고 있다.

 

곤혹스럽다는 문 대통령의 말은 정의연의 주장과는 다른 차원에서 비판받아야 한다. 문 대통령은 훨씬 일찍 곤혹스러워야 했다. 집권 초기 한·일 위안부 합의 문제를 다룰 때부터,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확정판결을 앞두고 있을 때부터 곤혹스러워야 했다. 한국에 유리한 싸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는 의견을 경청하지 않았고 지지자들은 그런 목소리에 ‘토착왜구’ 낙인을 찍었다.

 

‘불퇴전’을 외치며 대일 공세에 나섰던 정부는 지금 태도를 바꿔 뒤로 물러서고 있다. 수출규제를 풀지 않으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깨겠다던 엄포는 사라졌다. 이제는 해결 방안을 놓고 일본이 아닌 피해자들을 설득하겠다고 한다. 한국은 판결을 이행할 길도, 일본의 공세에 대응할 마땅한 방법도 없다. 모두 예상 됐던 일들이다.

 

한국이 도덕적 절대우위를 가진 과거사 문제에서 일본에 밀리는 초현실적 일들이 벌어지게 된 원인과 책임이 문재인 정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에 대한 강경 일변도의 목소리 외에는 용납하지 않는 한국 사회 전체의 책임이다. 일본 문제에 대해서는 생산적인 토론이 불가능하다. 무엇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 도덕적 우위를 계속 유지하려면 어떤 전략을 가져야 하는지 냉철하게 논의할 여지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반일감정을 정치적·사회적으로 이용하려는 부류, 그런 선동에 휘둘려 대책 없는 강경론을 외치는 부류,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눈치 보고 침묵하는 부류만이 존재한다. 그런 세월이 쌓여 이뤄진 결과가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한·일 과거사 문제의 현실이다. 정치인·관료·학자·법조인·언론·시민단체 모두가 공범이다.

 

이순신이 부산의 일본군 본진을 공격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은 나라를 구하려는 충정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싸움은 이기기 어렵고 결국 나라를 지킬 수도 없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제징용·위안부 판결의 후폭풍을 우려하고 정부 대응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것은 친일적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는 일본에 이기기도 어렵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진지하고 냉철하게 과거사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순신이 환생한다고 해도 친일파로 몰릴 수밖에 없는 지금의 사회 분위기가 바뀌어야 한다. ‘비분강개하여 목숨을 내던지는 것은 쉬우나 끝까지 참고 의를 성취하는 것은 어렵다(慷慨赴死易 從容就義難).’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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