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렬의 신한반도 비전]1965년체제 종식과 새 한·일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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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국제칼럼/한반도 칼럼

[조성렬의 신한반도 비전]1965년체제 종식과 새 한·일관계

by 경향글로벌칼럼 2019. 7. 23.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이 도쿄를 거쳐 23일 서울에 온다. 그는 서울에서 북·미 실무협상 재개, 호르무즈 호위 연합체 동참 외에 트럼프 대통령이 중재 가능성을 시사한 한·일 문제에 대해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양국 갈등이 증폭된 직후 데이비드 스틸웰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도 한·일 양국을 방문했지만 이렇다 할 중재는 없었다.


한·일 문제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양국이 스스로 해결하라는 것이다. 때문에 당장 미국이 중재에 적극 나설지도 의문이지만, 나서더라도 쉽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작금의 한·일 갈등은 단순한 이해조정으로 해결될 수 없는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한·일관계를 1965년체제라고 부르고 있다. 1965년 체결한 한일기본조약과 한일청구권협정 등 4개 협정이 양국관계의 토대가 됐기 때문이다. 일본은 한일기본조약과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식민지 지배의 법적 문제와 보상 문제가 모두 해결됐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 성노예, 근로자 강제동원에 대한 한국 측 문제제기로 양국관계의 법적 근간이 훼손됐다며 반발한다. 


하지만 한국은 일본 정부가 불법적인 식민지 지배를 인정하지 않은 데서 모든 문제가 파생했다고 본다. 일본 정부가 여전히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에 따른 진정한 사과를 회피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일청구권협정에서 다루지 않은 개개인에 대한 인권유린 등 불법행위에 대한 대법원의 배상판결은 별개라는 인식이다.


이같이 양국 갈등이 일본산 전략물자의 수출규제로까지 미치는 등 장기화 조짐을 보이자 국내 일각에서는 미국의 중재 역할을 기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1965년체제의 성립에 미국이 깊이 관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역할에 한계가 있다. 당시 미국은 지역통합전략에 따라 일본을 핵심파트너로 삼고 한국, 대만 등을 참여시켜 역내 냉전을 관리할 샌프란시스코체제를 구축했고, 1965년 체제도 그 일환으로 지원했다. 미국의 안보우산으로 경제건설에 매진할 수 있었고 일본의 청구권자금이 종잣돈이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와 상황은 크게 변했다. 그동안 샌프란시스코체제는 변화를 거듭했다.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뒤 이후 일본과 미국이 중국과 수교했고 남북 간에는 7·4공동성명이 발표됐다. 1990년대 초 냉전체제 해체로 한·러 및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고 남북한도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는 등 공존의 모색이 시작됐다. 최근 중국의 급부상은 샌프란시스코체제의 해체를 촉진하고 있다. 


1965년체제의 근간도 흔들려 왔다. 한국의 경제력이 급속히 향상되어 작년 말 국민총소득 GNI가 3만600달러로 일본의 80%에 근접했다. 인구 5000만명에 GNI 3만달러를 의미하는 ‘5030클럽’에도 세계 7번째로 가입했다. 지난해 수출액은 6011억달러로 일본을 1315억달러 차이로 바짝 쫓고 있다. 세계 제4위의 수출대국 자리를 놓고 한국이 일본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 샌프란시스코체제의 재강화와 해체의 상반된 움직임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한편으로 힘에 의한 평화를 내세운 미국은 중국을 겨냥한 무역 및 기술전쟁, 최근 들어 군비경쟁을 본격화했다. 다른 한편으로 비핵화 프로세스가 진행되고 새로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수립되는 등 한반도 평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아베 정권은 전후 부흥의 토대가 된 샌프란시스코체제와 불평등한 1965년체제를 토대로 전전 일본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것 같다. 한반도 비핵화·평화 프로세스 진행은 북한 위협론을 근거로 재무장을 서둘러온 아베에겐 커다란 도전이다. 아베 정권이 줄곧 북·미 정상회담에 시비를 건 배경이다. 한국 주도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와 일본 패싱에 대한 불편한 심경은 이번 경제도발의 한 원인이 됐다.


그렇다면 현 한·일 갈등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해법은 간단하다. 일본은 경제도발을 멈추고 한국의 국력과 지위를 인정하는 데 기초해 새로운 한·일관계를 정립해야 한다. 과거사 문제는 별도의 외교채널을 마련해 공동의 해법을 모색하도록 한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당시 한·일 역학관계를 반영한 것이라면, 현재의 변화된 역학관계에 맞춰 새로운 한·일관계를 맺는 것이 국제정치의 순리다. 


아베 정권의 목표는 한국에 타격을 가해 1965년체제를 유지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54년간 일본은 700조원에 달하는 무역흑자를 기록했는데도 부품·소재의 기술우위만 믿고 도리어 경제보복을 가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경제도발은 한국에 여러모로 기회가 될 것이다. 한국이 탈일본화에 성공한다면 중장기적으로 일본 경제의 퇴행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1965년체제의 종식은 샌프란시스코체제의 해체도 가속화해 동아시아 평화를 촉진시킬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일본의 경제도발에 물러설 수 없는 이유다.


<조성렬 |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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